기사몰락의 시작, 콜트레이크 전투(Battle of Kortrijk, Battle of the Golden Spurs) #1
-
이 글의 출처는 https://blog.gorekun.com/984 입니다. 출처를 지우지 않은 상태에서 비상업적으로 배포가 가능합니다.
-
이 글은 콜트레이크 전투의 토막글입니다. 태그를 클릭하시면 전체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서양 전쟁사에 있어서 기사 몰락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요? 보통 화약병기가 등장한 이후로 생각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백년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302년의 콜트레이크 전투부터입니다.
플랑드르 백작령, 유럽의 노른자 위
중세시대에는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같은 나라는 없었다. 단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에게서 영지를 하사받은 봉신들이 이 지방을 나누어 통치하고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 대략 현재 벨기에 서부의 동서 플랑드르 주를 중심으로 862년 성립한 플랑드르 백작령(Country of Flanders)이 있었다. 그리고 콜트레이크Kortrijk 시는 백작령에 속한 자치도시였다.
플랑드르 백작은 틀림없이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지만, 영지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독일) 양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양쪽으로부터 모두 봉토를 받고도 별다른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두 나라 모두가 중앙권력이 유치한 수준이라 멀리 떨어진 플랜더스 지방까지 챙길 여력이 안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틈을 타 플랑드르 백작령은 정략 결혼과 혈통을 통한 상속으로 그 영토를 넓혀, 상당히 큰 세력을 자랑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1세기 유럽은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시작했고, 자연히 이에 따라 교역량도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플랑드르 백작령은 어느 한 나라에 완전히 속한 영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주요 통상로로서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요새로 치면 홍콩같은 자유무역항 정도가 된 플랑드르에 떼돈이 굴러들어오게 된 것은 정한 이치였다.
또한 플랑드르 지방의 모직업 역시 크게 발전하게 되어 이 지방은 "떼돈"을 움켜쥐게 되었다. 자연히 겐트Ghent, 브뤼헤Bruges, 이프르Ypres 등의 도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세금 수입도 엄청났다. 물욕에 초탈한 수도승이 아닌 이상, 이 엄청난 돈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만한 신사는 없었을 것이고 - 이것은 프랑스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국왕의 야심
이 시기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봉건 영주들의 영지를 빼앗아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자면 영주들이 반발할 것은 당연했고, 프랑스 국왕 필립 4세 Philip IV는 이를 억누르기 위한 무력 - 을 갖추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필립은 많은 세금을 짜낼 수 있는 플랑드르 백작령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필립은 플랑드르를 빼앗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교묘하게 플랑드르의 귀족들과 시민들에게 이런저런 특권을 부여해 가며 슬금슬금 백작령의 통치권을 잠식해 나갔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플랑드르의 큰 도시마다 프랑스인 감독관이 파견되어 직할 통치나 다름없는 간섭을 해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필립이 플랑드르 백작의 독자적인 권한인 통화권까지 손을 대기 시작하자 플랑드르의 백작이자 필립 4세의 대부(Godfather)인 담피에르의 귀Guy of Dampierre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욱 열받는 것은 그는 프랑스 왕국의 법정에 자신의 사정을 탄원할 권리조차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귀에겐 뭔가 문제를 해결할 만한 방법이 필요했는데,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1293년, 가스코뉴와 노르망디의 선원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당시 두 지방 모두 프랑스 국왕의 영토 안에 있던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였다.)이 빌미가 되어 가스코뉴에 있던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들이 잉글랜드 국왕을 프랑스 법정에 고발한다. 지금의 국가 관념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는 노르망디, 아퀴탱의 영주이자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좌우지간, 에드워드의 영토를 빼앗아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던 필립에겐 좋은 핑계가 생긴 셈이었다. 그는 에드워드에게 법정에 출두할 것을 명했는데 - 에드워드도 바보가 아닌 이상, 법정에 출두할 이유가 없었다. 어쨋든 필립은 에드워드의 영지를 빼앗을 심산인 걸 에드워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법정 출두를 무시했고, 필립은 얼씨구나 해서 군대를 소집했다. 필립의 군대가 가스코뉴를 침공함으로써 1294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12세기 말 이미 프랑스에 영지의 서쪽 지방을 빼앗긴 바가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프랑스 국왕에게 영지를 죄다 빼앗길 판이니 - 결국 귀는 1297년 1월 7일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고 이틀 뒤에는 필립과의 주종 관계를 파기했다. 이렇게 해서 분기탱천한(이라기보다 이번에도 얼씨구나 싶은) 필립은 군대를 일으켜 플랑드르를 침공했다.
안녕하세요. 잘 읽고 갑니다.
일년전에 쓰신 글에 댓글 다는 건 좀 어색합니다만,
‘공정왕’이란 칭호는 오역의 산물인 것으로 압니다.
프랑스어 ‘Le Bel’의 영어식 표현 ‘The Fair’에서
Fair는 ‘공평’이라는 뜻과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필립4세의 경우는 후자의 뜻입니다.
말하자면 ‘미남왕’이라는 이야기지요.
아하, 그런 것이었군요. <미남왕 필립>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죠.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