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검심이 가진 다섯 가지 미덕

<검심>은 말 그대로 일세를 풍미한 만화였습니다. 아마 여기에 태클 거실 분 별로 없으실 겁니다. <검심>이 한창 나오던 때는 제가 중학생일 때인데, 만화 좋아하는 남자애들은 물론이고 순정만화밖에 안 보던 여학생들도 이 만화만은 많이 봤었더랍니다. 연재가 끝난 지도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피규어가 발매되고 코스프레의 대상이 되는 만화, 그리 흔하지는 않지요.

모르긴 몰라도 이 데뷔작 하나로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는 돈방석에 앉았을 겁니다.

<강철의 연금술사>도 그랬습니다만 <검심>은 초반이 굉장히 강력한 만화입니다. 모든 문화컨텐츠가 다 그렇습니다만, 역사물에 있어서는 이게 더 중요합니다. 수용자가 지루할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시작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역사물이 다루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독자에게 설명을 해야 합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도 당연히 다 해줘야죠. 이 과정이 다수 지루하거나 설명조가 되면 독자는 바로 만화책 덮습니다.

<검심>은 첫 에피소드부터 기승전결이 완벽합니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 카미야 활심류 도장을 빼앗으러 온 히루마 형제가 발도재를 사칭하며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마침 지나가던 진짜 발도재, 히무라 켄신이 이 넘들을 순식간에 박살내버립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이미 할 설명을 다 했습니다. 문명개화로 인한 시대의 변화와 경찰과 같은 관료들이 횡포를 부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분위기, 칼을 못 차게 하는 폐도령과 히무라 켄신의 역날검, 비천어검류 검술 등등.

더 좋은 건 어찌나 이야기 속에 설명을 잘 버무려 넣었는지 독자가 설명을 받았다는 느낌이 잘 안 든다는 겁니다. 독자의 머릿속이 지나치게 복잡해지지 않게 소수의 정리된 캐릭터들만 보여 주기도 하지요. 에피소드 원이 강한 것, 이것이 <검심>의 첫번째 미덕입니다.

작가의 설명 능력은 세세한 일상을 묘사하는 데에서도 두드러집니다. <검심>은 보통 역사책에서 주력하는 "위대하고 잘난 인물들의 이야기" 에서 벗어나, 이름없는 평민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화가가 된 사노스케의 친구, 켄신 일행이 자주 외식하러 가는 고기전골집, 새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야쿠자 패, 칼 만드는 것을 그만둔 도공 등등.

이들을 통해 <검심>은 풍성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책의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될 정도로. 이 수많은 사연들은 역사물로서의 <검심>의 세계를 더욱 재미있고 실감나게 꾸며 줍니다. 그뿐입니까,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하나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10원짜리 단역 신세를 면하게 하죠. 역사적 지식이 있다면 <검심>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도 있지요.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쇠고기 요리 등이 없었습니다만, 문명 개화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이 쇠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메이지 시대에는 쇠고기 요리가 서민들의 외식으로 인기를 끌었죠. 켄신 일행이 전골집에 외식을 하러 가는 것은 이러한 배경이 숨어 있습니다.

백년 전의 세계를 독자 눈앞에 꺼내 놓듯이 묘사하고 캐릭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연출 능력, 이것이 <검심>의 두 번째 미덕입니다. 최대한 묘사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이야기의 맥을 끊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짧게 설명을 곁들이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센스에 일본 역사를 모르는 한국인들까지도 대량으로 낚인 걸 보면 정말 제대로 낚은 겁니다.

이런 세세한 묘사는 기본적으로 그 시대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검심>과 3류 판타지 멜로드라마의 차이점이 아마도 이런 것이겠죠. 얼마나 자국 역사에 애정이 없으면 엉망으로 묘사하는 것도 모자라 부여 왕이 스스로를 황제를 칭하는 엽기적인 역사 왜곡까지 저지르겠습니까. 한국인에게도 애정을 받지 못하는 한국 역사가 외국인들에게 쓰레기 취급당하는 건 지극히 합당한 대우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검심>의 이야기는 히무라 켄신이 검술솜씨로 각종 적들을 물리쳐 가는 과정을 그린 만화입니다. 자연히 다양한 적들을 준비해서 켄신에게 "자아, 이 넘을 쓰러뜨려 봐라!!" 며 던져줄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 와쯔키 노부히로는 상당히 외부 환경에서 영향을 잘 받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검심>에 등장하는 다양한 적들과 캐릭터에서는 애니메이션이나 피규어들의 영향이 간간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검심>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것은 현대물에 등장하는 각종 괴인들을 메이지 시대 버전으로 성공적으로 번안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부여해서 기괴한 캐릭터들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갑옷 등의 소품을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극찬을 받을 만한 뛰어난 번안 능력, 이것이 <검심>의 세 번째 미덕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을 받쳐 주는 훌륭한 그림솜씨와 연출력, 사이사이 적절히 끼워 주는 개그 센스가 각각 네 번째, 다섯 번째 미덕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역사와 재미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 역사물의 이상으로 주저 없이 <바람의 검심>을 꼽습니다. 이 만화는 그만큼 높은 찬사를 받고,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어쨌든 <검심>은 대단한 히트작이며, 한국이든 일본이든 이 정도 수준의 만화가 나오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죠.

22 thoughts on “바람의 검심이 가진 다섯 가지 미덕

  1. 이번 달 애장판이 나오면 질러서 빌려드릴께요. 아직 3,4권이 안 나와서리 ^^;

    • 맞다, <데스노트> 작가분이셨죠. <원피스> 작가분도 이 계열로 알고 있습니다.

  2. 만화책을 사는 일이 거의 없는 제가 몇권이나마 산 유일한 만화책;; 개인적으로 눈 쫙 찢어진 사이토가 참 마음에 들었다는;; 검심 이후 노부히로 와쯔키의 무장연금은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보았는데 일반적인 평은 참 눈물나더군요;;

    • <무장연금>에 대해서는 “작가가 이미 밑천을 다 들어먹었다” 는 평이 있더군요. 그래도 앞으로는 좋은 작품 그려줬으면 합니다.

  3. 저도 한때 열심히 봤었죠. 근데 후반부터 드래곤볼 feel이 나면서 지겨워지더군요.. 앞부분이 훨씬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4. 건 블레이즈웨스트나 무장연금은 참 눈물나게 재미없었어서..;ㅁ;

  5. 오바타 타케시 는 데스노트에서 절정의 히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그 전에 어둠의 인형사 사콘으로 일단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데 성공했고, 고스트 바둑왕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아버렸지…
    사실 내가 맨 처음 본건 고스트 바둑왕. 그래서인지 데스노트가 최대히트작이지만 바둑왕의 느낌이 더 강하더군.
    (재밌는건 바둑왕도, 데스노트도 요즘 새로 연재하는 블루드래곤도 전부 주인공에게 뭔가 괴상한 비인간 동료가 붙어다닌다는거..)

    • 그 <어둠의 인형사> 얘기는 처음 듣는데? 한국어판이 있을라나…
      그나저나 정말 비인간 동료를 좋아하는 만화갈쎄 :D

  6. 켄신은 개인적으로 교토의 시시오전이 최고 절정인듯함.
    역시 악당은 주인공보다 월등하게 쎄며 카리스마 풀풀 흘려주시고, 간지와 무자비함이 묻어나와야….(비밥의 비셔스 처럼…)

    추억편이나 성상편은…. 뭐랄까 만화책 켄신과는 사실 별개의 작품으로 느껴지는듯… 그림체도 다르고 분위기도 너무 달라서…(싫다는 건 아님)

  7. 텍스트큐브에서 작성된 비밀 댓글입니다.

  8. 바람의 검심은 추억편이 젤젤젤 나은거같아요. 만화책보다 더 고증이 살아있고, 천상용검 이따위 기술들은 안나오고, 실존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특히 막부 말기때 비참한 서민들의 모습도 잘 보여줬고, 그래서 시대상을 가장 잘살린 시리즈라고 보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추억편을 많이 찾는거고요. 제가 생각해도 추억편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이 성상편 그 다음이 만화 그 다음이 TV. 가장 뷁스런 시리즈는 고딩때보던 극장판. TV판은 처음엔 좋은데 가면 갈수록 이뭐병되는거같고, 극장판은 뭐….
    만화판은 뭐 저한테는 극과 극이네요. 너무 좋다가도 때론 천상용검 따위라던가 온갖 잡기술들이 다 나오고, 소지로가 오쿠보 죽이고 별의별 구라들이 다 나와서 또 너무 싫고,

  9. 그나저나 이글 좀 퍼가면 안되겠습니까?

    • 퍼간 글에 원문 출처 밝혀 주시고, 제 블로그에 퍼간 주소 밝혀 주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반응이 어떨지 저도 궁금하네요 :D

  10.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부여 왕이 스스로를 황제를 칭하는 엽기적인 역사 왜곡까지 저지르겠습니까.] 라고 해서 우리나라 사극 이야기 좀 해볼려고 하는데. 한 인물에 촛점을 맞춰야할때 도화서에 주 촛점을 맞추고, 왠 멜로가 나와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은 그 사극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요즘은 비난을 받아서 좀 스토리가 바껴서 좀 낫던데. 참고로 그 사극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뭐 이렇게보니까 바검과 그 사극과 차이점도 있네요. 켄신은 적어도 여주인공이 만화의 주 주인공이 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은 절대 안일어난다는거네요.

    그리고 주 촛점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켄신의 삶이라던가 켄신을 둘러싼 이야기들인데도, 카미야 활심류도장에 주 촛점이 맞춰진다던가 카오루의 촛점이 맞추어지는 본 취지랑은 전혀맞지가 않는 상황이 재현되지만은 않네요. 휴…생각해보니까..울나라 요새 사극들 좀 안습

    그나마 그 사극이 지탄을 받고 좀 내용이 바뀌었으니. 물론 전 그 사극의 팬이긴 하지만…. 한번 기대해봅니다.

    • 도화서 이야기라면 <이산> 이겠군요. 시간도 없고 별로 흥미를 끄는 것도 없고 해서, 요즘 한국 사극 드라마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전 우리나라 사극에서 그놈의 멜로 라인 좀 많이 배제했으면 좋겠습니다. <로마> 같은 사극을 보면 사랑 이야기는 이야기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지 않습니까? 요즘 사극이 현대화 되었느네 어쩌네 하는데, 제 짧은 식견으로 보기에는 현대화라기보다는 아줌마 드라마화 되었다는 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11. 확실히 스토리와 적들의 톡톡튀는 개성은 최고였습니다만..
    정의라는 가치관때문에.. 후반엔 그다지 재미있지않고..
    히무라 켄신을 싫어하겠되었습니다아 데헷♡

    • 확실히 추억편까지가 최고였죠. 유키시로 에니시와의 싸움은 확실히 점프 편집부가 억지로 잡아 늘인 듯한 분위기를 많이 풍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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