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예보병, 히파스피타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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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기원전 7세기 중반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의 팔랑기테스(Palanx) 전술은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기본적으로 팔랑기테스 전술이란, 창Dory과 방패Hoplon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호플리테스Hoplite)들이 밀집 대열을 이루어 싸우는 고대 그리스 특유의 전투 방식을 가리킨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고대 그리스의 전쟁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기본적인 전투 방식은 수백여 년 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 발명의 천재라는 그들의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이러한 흐름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였다. BC 4세기 중엽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것은 테바이였는데, 덕분에 약소국의 왕자였던 그는 소년 시절 테바이에서 인질 생활(BC 368~BC 365)을 해야 했다. 3년 뒤 그는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일리리아 인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전사한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BC 359). 그리고 그는 테바이에서 공부한 전술학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 군대를 개조하는 데 착수했다.
필리포스의 병제 개혁은 크게 중보병 강화와 기병대의 활용,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약 2.4m 정도의 창으로 중무장한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이루고 싸우는 방식이었다. 필리포스는 먼저 중보병(페제타이로이Pezhetairoi)들에게 4.5m~5.5m에 이르는 장창, 사리사Sarissa를 장비시켰다. 사리사는 긴 길이만큼 다루기 힘들 뿐더러 보병의 이동 속도를 느리게 했지만, 밀집 대형과 함께 사용될 경우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히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그는 중무장 엘리트 기병(헤타이로이Hetairoi)과 경무장 기병(프로도르모이Prodromoi)들을 고도로 활용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의 기병들이 그 수도 적고 정찰 등의 제한적인 임무만을 수행한 반면, 이들은 중무장 보병들이 붙잡아놓은 적 대열의 옆이나 뒤를 공격·돌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대의 탱크 정도랄까.
새로운 전술의 효과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주변 여러 나라의 침략에 시달리던 마케도니아는 급격히 강대국으로 변모했으며, 어느 새 문화적 스승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넘볼 정도가 되었다. 결국 BC 338년, 필리포스 2세는 아테나이와 테바이의 연합군을 카이로네아Chaeronea에서 대파하고 그리스의 패권을 움켜쥐었다.
마케도니아의 흥기는 전술적인 혁신에 힘입은 바 크지만, 이러한 전술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병종의 등장을 낳았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데, 군사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보병과 중기병을 연결하는 병종이 필요해졌다. 페제타이로이는 사리사를 장비함으로써 막강한 전방공격력을 보유하였지만, 그만큼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이는 언제고 전쟁터에서 기병과의 거리가 벌어져 적에게 측면을 노출하게 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보병과 중기병 사이에 보다 보다 기동성 있는 보병 부대를 배치하여 전투 대열에 빈 틈이 생기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국왕의 근위대 역할을 할 병력도 필요했다.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의 군대는, 출신 지역별로 편제되어 그 지역 귀족 등의 지휘를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군대의 일부분을 통제하고 있는 귀족들이 언제고 반란 등을 획책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게다가 기원전 4세기 중후반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엄연히 급팽창한 신흥 세력인 만큼, 새로 복속된 지역 출신의 병력은 그 충성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히파스피타이는 이러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본래 히파스피타이는 "방패를 든 자" 라는 뜻이며, 이는 그들의 무장을 시사한다.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사리사보다 짧은 창을 들었다면 방패는 비교적 큰 것을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역사가1들은 그들이 방패를 은으로 장식했다는 의미에서 "은방패Argyraspids"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엘리트 보병으로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히파스피타이는 평소 국왕의 경호 임무나 헌병대 역할을 맡을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위험하고 힘든 일(기병과 보병을 연결하고 기병을 도와 적진을 돌파하는)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병사만이 히파스피타이가 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히파스피타이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알 수가 없다. 헤타이로이의 종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꽤 설득력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BC 338년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이들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필리포스 2세의 시기에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나갈 때 데려간 히파스피타이는 모두 3개 연대Chiliarchia, 3천 명을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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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dorus, Curtius Rufus ↩
저는 왜 몇몇 군주들에게서 보이는 과거의 포로생활이
눈에 띄는걸까요,,
드라큘라도 그러했고,또 그는 투르크 족을 방어한 명장인데
역시..어릴때 포로생활이 중요한건가…?
유학이 한 종류인가..???<-그럴리가 없잖아
저기에 착안(?)해서 나온 망상이 알렉산더 대왕은 사실 진시황이었다…. OTL
은근히 그런 경우가 많지요. 아마 그런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또 적에 대해서 잘 알게 된다는 점이 나름 강점 아닐까요. 필리포스 2세의 경우도 테바이에서 인질 생활(≒유학 생활)중에 테바이의 명장 에파미논다스에게 전술학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청출어람인지도 모르죠.
고대의 전쟁에서는 기병의 비중이 생각보다 적지 않았나요? 등자의 발명 이전에 말을 탈 수 있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교육을 받았던 귀족이나 태어나면서 말을 타면서 자란 유목민족 이외에는 말을 접하고 탈 기회가 많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마케도니아에서 기병을 전술적으로 운용을 하려면 적어도 이전부터 구축된 말이나 기병에 대한 인프라가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사실 그 분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지만요;;;;
고대 전쟁에서 원래 기병 비중이 낮았지만, 알렉산드로스부터 기병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되었지요. 물론 등자가 없다는 한계는 여전했겠지만요.
마케도니아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몽골 고원에서 도나우 강에 이르는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던 유목 민족과 접촉할 기회가 그리스 본토보다 상대적으로 빈번했던 걸까요? Leviathan님 말씀 듣고 보니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예, 말씀하신 대로 고대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접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 사실상 한정이 되었습니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입니다. 몽골처럼 말이 흔한 지역에서 태어나서 자랐던지, 아니면 돈이 많은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났던지.
마케도니아 왕국의 경우, 이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됩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마케도니아 기병의 양대 축은 마케도니아 귀족과 테살리아 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기마민들이 사는 땅 출신인 테살리아인이 전자의 케이스라면 마케도니아 귀족들은 후자의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마케도니아의 지형적 위치 / 사회적 구조가 기병 동원을 좀 더 유리하게 만드는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경우 대부분이 산악 지형인 데다가 중산 시민을 제외한 귀족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병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테바이 같은 경우가 예외적으로 다른 도시 국가에 비해 훨씬 많은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케도니아나 테살리아를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군 중 그리스 인은 보병의 1/3 이상을 차지했지만, 기병은 전체의 1/10에 불과하며, 전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비중은 더 낮습니다.
1.히파스피타이, 헤타이로이, 페제타이로이는 각각 가위 바위 보 관계인듯한 착각이…
2. 고대 그리스는 멋집니다~~
하하, 저도 사실 고대 그리스의 투구에 끌려서 공부를 시작했더라지요 :D
마지막에 3천 명이라는 게 어느 정도 규모인지 (많은 건지 적은 건지조차) 감이 잘 안 오는데요. 어느 정도 되는 건가요?
페르시아 원정 당시 알렉산드로스가 이끌고 간 병력 중 보병은 대략 2만 2천명 정도 됩니다. 만 2천명은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 7천 명은 그리스 호플리테스, 3천 명이 히파스피스타이입니다. 그러니까 전체 병력의 10%를 약간 넘었다고 해야겠지요.(마케도니아 보병의 1/5)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과의 결전인 가가우멜라 전투에서는 그리스인 용병을 8~9천 명 가량 고용했기 때문에 이들의 비율은 크게 떨어지게 됩니다.
현재 영국군 근위대와 비교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영국 근위대의 병력 구조에 대한 자료가 없으니 비교해 볼 수가 없네요.
마케도니아 팔랑기테스 보병들의 출현은 단지 필리포스2세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죠.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아테나이 출신 군인 이피크라테스의 군제개혁을 통해 3.5~4미터에 달하는 장창이 이미 헬라스 나라들에 보급돼 있었습니다. 필리포스의 업적은 팔랑기테스 보병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이피크라테스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킨거라고 봅니다. ㅎㅎ
그렇죠. 이피크라테스의 병제개혁은 창을 길게 하고 방패를 경량화하는 방향이었다는 점에서 필리포스의 것과 일치합니다. 실제로 이피크라테스식 팔랑기테스가 장비했던 창의 길이는 대략 3.6미터 정도니까, 전통적인 팔랑기테스와 마케도니아 팔랑기테스의 딱 중간이죠. 필리포스의 병제개혁은 결국 이피크라테스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합니다.
다만, 이피크라테스식 장비가 기존의 팔랑기테스의 장비들만큼 인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기존의 팔랑크스를 대체한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의 팔랑기테스처럼 막강한 정치적 파급력을 가진 것 또한 아니기 때문에 팔랑기테스의 진화사에서 빠뜨리거나 대충 다루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