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기원전 7세기 중반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의 팔랑기테스(Palanx) 전술은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기본적으로 팔랑기테스 전술이란, 창Dory과 방패Hoplon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호플리테스Hoplite)들이 밀집 대열을 이루어 싸우는 고대 그리스 특유의 전투 방식을 가리킨다.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고대 그리스의 전쟁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기본적인 전투 방식은 수백여 년 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 발명의 천재라는 그들의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이러한 흐름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였다. BC 4세기 중엽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것은 테바이였는데, 덕분에 약소국의 왕자였던 그는 소년 시절 테바이에서 인질 생활(BC 368~BC 365)을 해야 했다. 3년 뒤 그는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일리리아 인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전사한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BC 359). 그리고 그는 테바이에서 공부한 전술학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 군대를 개조하는 데 착수했다.

필리포스 2세를 묘사한 메달. http://en.wikipedia.org/wiki/Image:Philip_II_of_Macedon_CdM.jpg

필리포스의 병제 개혁은 크게 중보병 강화와 기병대의 활용,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약 2.4m 정도의 창으로 중무장한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이루고 싸우는 방식이었다. 필리포스는 먼저 중보병(페제타이로이Pezhetairoi)들에게 4.5m~5.5m에 이르는 장창, 사리사Sarissa를 장비시켰다. 사리사는 긴 길이만큼 다루기 힘들 뿐더러 보병의 이동 속도를 느리게 했지만, 밀집 대형과 함께 사용될 경우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히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그는 중무장 엘리트 기병(헤타이로이Hetairoi)과 경무장 기병(프로도르모이Prodromoi)들을 고도로 활용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의 기병들이 그 수도 적고 정찰 등의 제한적인 임무만을 수행한 반면, 이들은 중무장 보병들이 붙잡아놓은 적 대열의 옆이나 뒤를 공격·돌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현대의 탱크 정도랄까.

영화 의 한 장면. 페르시아군과의 전투를 앞둔 페제타이로이들이 대열을 갖추고 있다. 페제타이로이는 "걷는 친구들" 이라는 뜻이다. 다루기 힘든 긴 창을 다루는 만큼, 당대의 다른 보병들에 비해 작은 방패를 장비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정예 기병, 헤타이로이. "왕의 친구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물론 무장 또한 훌륭했다.

새로운 전술의 효과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주변 여러 나라의 침략에 시달리던 마케도니아는 급격히 강대국으로 변모했으며, 어느 새 문화적 스승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넘볼 정도가 되었다. 결국 BC 338년, 필리포스 2세는 아테나이와 테바이의 연합군을 카이로네아Chaeronea에서 대파하고 그리스의 패권을 움켜쥐었다.

마케도니아의 흥기는 전술적인 혁신에 힘입은 바 크지만, 이러한 전술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병종의 등장을 낳았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데, 군사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보병과 중기병을 연결하는 병종이 필요해졌다. 페제타이로이는 사리사를 장비함으로써 막강한 전방공격력을 보유하였지만, 그만큼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다. 이는 언제고 전쟁터에서 기병과의 거리가 벌어져 적에게 측면을 노출하게 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보병과 중기병 사이에 보다 보다 기동성 있는 보병 부대를 배치하여 전투 대열에 빈 틈이 생기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국왕의 근위대 역할을 할 병력도 필요했다.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의 군대는, 출신 지역별로 편제되어 그 지역 귀족 등의 지휘를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군대의 일부분을 통제하고 있는 귀족들이 언제고 반란 등을 획책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게다가 기원전 4세기 중후반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엄연히 급팽창한 신흥 세력인 만큼, 새로 복속된 지역 출신의 병력은 그 충성심을 확신할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히파스피타이는 이러한 환경에서 탄생했다. 본래 히파스피타이는 "방패를 든 자" 라는 뜻이며, 이는 그들의 무장을 시사한다.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사리사보다 짧은 창을 들었다면 방패는 비교적 큰 것을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역사가1들은 그들이 방패를 은으로 장식했다는 의미에서 "은방패Argyraspids"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엘리트 보병으로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히파스피타이는 평소 국왕의 경호 임무나 헌병대 역할을 맡을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위험하고 힘든 일(기병과 보병을 연결하고 기병을 도와 적진을 돌파하는)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병사만이 히파스피타이가 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히파스피타이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알 수가 없다. 헤타이로이의 종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꽤 설득력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BC 338년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이들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필리포스 2세의 시기에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나갈 때 데려간 히파스피타이는 모두 3개 연대Chiliarchia, 3천 명을 헤아렸다.


  1. Diodorus, Curtius Ruf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