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적벽대전』의 미늘 투구
생업에 바쁜 나머지 이미 지나가버린 이슈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허전해서 일단 포스팅합니다.
설 연휴 직전, 케이블 Tv에서 영화 축약판을 보다가 눈이 퍼뜩 띄었습니다. 바로 아래 장면입니다.
조조군 기병들이 상당히 재미있는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조그만 쇠미늘으로 투구를 만들어서 손을 대면 달그락거릴 것 같네요. 생긴 것도 재미있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점입니다: 이 투구는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보이는 투구거든요.
관모형 소찰주
영화 속에 나온 것과 같은 투구를 소찰주(小札胄)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작은(小) 미늘 철판(札)을 수십 개를 가죽끈 등으로 연결해서 만든 투구(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투구 정수리 부분이 비어 있어서 그 위에 관모(冠帽)처럼 생긴(形) 장식을 착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관모형 소찰주(冠帽形小札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장식성이 강한 투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상당수가 철판 위에 금동을 입힌 형태로 발견됩니다. 어지간한 고위 무사가 아니면 착용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출처 |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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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 반계제 고분군 | 금동장 + 철제 |
경상남도 합천 옥전 | 철제 |
경상남도 고성 송학동 | 금동장 + 철제 |
경상북도 경산 임당 고분군 | |
(전) 부산광역시 연산동 | 철제 |
(전) 경상남도 창녕군 | 금동장 + 철제 (관모 장식만 남아 있음) |
이 투구가 또 재미있는 것은, 그 계보가 묘연하다는 점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투구가 나오는 시기는 5세기 후반의 고분에 집중됩니다. 이 시기쯤 쓰였다는 얘기죠.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투구가 흡사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 마냥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양의 투구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합천 고분군에서 이 투구가 나왔을 때 발굴자 분들도 꽤나 당황했을 듯합니다.
굳이 비슷한 형식의 투구를 들자면, 중국 하북성河北省 연하도燕下都 44번 고분에서 나온 투구1 정도가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 고분이 전국시대 후기의 고분이라는 것. BC 221년, 진나라의 천하 통일로 중국의 전국시대는 끝을 맺었으니까...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투구와는 못해도 700년간의 공백이 비어 있는 셈입니다.
전국 시대 후기에 중국 변방에서나 보이던 투구가 어떻게 700년 뒤 갑자기 한반도에 나타났는지, 그 내역은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이러한 형식의 투구는 이 투구 한 점 뿐입니다. 한족이 처음으로 만든 것인지, 북방 기마 민족이 먼저 사용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투구인 셈입니다. (이런 투구를 가져다 영화 소품으로 사용한 제작진의 눈썰미도 대단합니다.)
제가 참고한 논문을 쓴 신경철 교수의 경우 "중국과 교역이 많았던 백제를 통해 소찰주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가야 근처까지 흘러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설을 주장하시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설이 가장 그럴 듯 해 보입니다. 현재까지 나온 투구들은 대략 5세기 말 가야 지역에서 나온 것들인데, 실제로 이 시기 가야는 백제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칼이나 방패, 등자 등의 전쟁 도구에서 비슷한 것들이 자주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형식의 투구가 중국(남조) → 백제 → 가야의 순서로 전파되었다면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부여에서 나왔다는 금동 소찰주도 한 점 전해지거든요.
이따금 백제와 대가야의 장성들이 모여서 신라와의 전쟁 계획을 의논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아마, 너도나도 소찰주를 써서 투구만 봐서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 같네요.
참고문헌
- 『삼국시대 철제갑주의 연구: 영남지역 출토품을 중심으로』, 송계현, 1988
- 『』, 신경철, 1989
- 『한국 고대 갑옷과 투구의 연구』, 장경숙, 2005
ps) 영화를 보다 보니 이런저런 갑옷이 많이 보이네요. 조조군 간부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통수개로 보이는데, 이 갑옷은 삼국 시대 때 실제로 쓰인 갑옷이니 맞다고 해야겠지요. 조자룡과 장비는 경번갑을, 관우는 어린갑을 입고 있네요. 중국의 갑옷에 대해서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스치듯 본 인상으로는 우리나라 사극보다 고증면에서는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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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찰주가 발견되었을 때, 이 투구를 참고로 해서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 ↩
이것은 좋은 것이다.
바람의 나라에서 로만 트룹을 본 이후로, 저는 대한민국 사극을 완전히 포기했죠.
그나저나, 적벽대전은 간지폭풍이군요.
1. 아니, 로마 식 갑주까지 등장했단 말씀이십니까? 전차전 운운할 때부터 어이가 없었는데 결국 사고를 치는군요.
2. 영화 자체는 재미가 없다고 하더군요.
찰갑투구라면 고구려 벽화(삼실총, 집안 제 12호 무덤)에서도 보이는 것을 보면 광개토대왕시기 한반도 남부를 공격할때 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리고, 비늘투구(소찰주)도
1.각 소찰의 형태가 정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고, 소찰간 연결을 두정(리벳)을 사용하여 결합한 종류(고구려 벽화그림, 아차산성출토유물=(?)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소찰투구,한천 반계제 가A호분, 합천 옥전 M3 분 , 고성 송학동 1A-1호 분 등),
2. 소찰의 형태가 직사각형이고, 소찰간 연결을 가죽끈으로 엮은 종류로 나뉘던데(영화에 나온 형태, 경산 임당 E Ⅰ-1호). 그차이에 대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에대한 근거는 “한국고대 갑옷과 투구의 연구 / 장경자 / 동아대 대학원”이고, 논문의 비늘투구(소찰주)에 대한 부분을 읽고 생긴 의문점 들 입니다.
1. 고구려 → 백제 → 가야 전파설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제가 중국과의 교역을 많이 했던 것으로 미루어 봐서 중국풍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삼국사기의 백제말에 대한 기록 등에서도 추론이 가능하기야 합니다만, 저 시기의 중국 갑옷과 소찰 투구는 꽤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논문을 찾아보면 삼실총 공성도에 그려진 무사의 투구가 찰갑투구인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그 그림의 고해상도 버전을 보지 못해서 확신은 못 하고 있습니다.
2. 소찰주를 두 가지 형태로 나누는 것은 그 논문뿐만 아니라 1988년의 송계현 교수 논문에서 먼저 나타납니다만, 아직 유물 수가 너무 적어서(그나마 제대로 꼴을 갖춘 건 두 벌 뿐) 범주화하기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http://test.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77732&page=1
[출처] 고구려벽화 유네스코등록된 것들 무료로 고화질 보는곳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나를찾아
북한지역 벽화이고, 만주쪽은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빠진 벽화가 많네요..;;;
좋은 링크 감사합니다. 국립 중앙박물관에도 고구려 벽화 도록을 팔던데 다음에 갈 때 사와야겠습니다. 졸라맨K님도 혹시 가실 일 있으시면 사오세요. :)
이미 부분적으로 언급하셨지만 전 연산동 출토 관모형 복발주, 전 창령 출토 관모형 복발주는 지름 12~14cm급의 복발만 남아있을 뿐이어서 나머지 부분이 과연 소찰주(미늘 투구)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양식의 투구죠.
제가 예전에 전국시대 연하도의 사례만 언급했는데 98년 서한 제왕묘 등 몇군데 고분에서 소찰주의 사례가 확인됐고 2000년대 이후 진시황릉 배장갱에서도 부장용 석제 소찰주가 출토가 된 상태입니다. 연하도-진-서한으로 이어지는 계보적 흐름이 확인된 셈이죠.
여기에 일본 고분시대 2기, 고분시대 4기의 소찰주까지 고려해야 전체 동아시아 소찰주의 계보도가 그려질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소찰주의 상한선은 20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한나라대 소찰주와 우리나라 5세기대 소찰주 사이에 연결고리로 생각해 봄직하죠.
자세한 글은 트랙백으로 올리겠습니다.
한중일 3개국 미늘 투구(소찰주)의 계보
http://lyuen.egloos.com/4837828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름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일본과 중국에서 그런 유물이 나왔는지는 몰랐군요. 역시 번동아제님이십니다 ‘-‘)b
무용총 무사도 소찰주 투구를 쓰고 있더군요. 머리에 관모하나 올리고..ㅋ
무용총 무사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고구려 벽화 중에서도 관모형 소찰주가 묘사된 게 몇 개 있었습니다. 무용총에 있던 또다른 기마무사상은 관모만 쓰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