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이야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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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 설명하는 이야기
발달심리학 연구자들에 의하면, 똑같이 돈을 많이 벌고 똑같은 사회적 지위에 올랐어도 자기가 왜 거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은 스스로도 성공했다고 느끼지 못한다. 정리하면, 우리는 언제나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야기의 형식으로 바꿔서 받아들인다.
- 장근영, , 메가트렌드, 2007, pp.75
신화 하면 보통 떠올리는 것이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신들의 이야기이다. 신화란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좀 다른 스타일의 신화들도 있는데,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이 생겨난 내력을 설명하는 이야기들도 신화라고 한다. 천신과 지신의 결합으로 나라가 생겨났다는 대가야 건국 신화가 이런 식이다. 실제로 대가야의 건국의 두 축은 고령에 살던 토착민들과 철제 무기를 가지고 외지에서 온 이주민들이었다.
"어떠한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은 인간의 본능이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에도 적용되는데, 신화의 상당수는 이런 식으로 어떠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역사적인 사실만으로는 너무 딱딱해지기 십상이니, 사람들의 믿음1 같은 것들을 끼워넣어서 재미있는 맥락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역사는 신화가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게다가 이런 류의 신화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 만들어진다. 당연히 신이나 영웅 따위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타넨베르크 전투에 얽힌 전설, 혹은 거짓말
타넨베르크 전투와 바보 이반의 전설 by Periskop
필자와 관심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언제나 전쟁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시는 periskop 님의 블로그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다.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제 1차 세계대전의 타넨베르크Tannenberg 전투의 뒷이야기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삼소노프와 렌넨캄프는 러시아 군을 이끈 장군이었다. 하지만 삼소노프가 렌넨캄프의 협조 부족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하게 되면서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주먹질을 하며 싸우기까지 했다.제 1차 세계대전(1914~1919)이 발발하자, 두 장군은 함께 독일군과 싸우게 되었다. 독일군 참모장교는 이들이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독일군은 두 장군이 서로 협력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러시아군을 유인한 뒤 각개 격파하는 작전을 펼쳤다.
독일군의 작전은 그야말로 대성공, 러시아군은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다. 전쟁 초장부터 승기가 꺾인 러시아군은 기나긴 패주를 경험해야 했으며, 1917년에는 공산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었다.
Periskop 님 설명에 의하면,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순 뻥이다. 독일군의 승리는 러시아군의 전략적 오판과 독일군의 통신기기 감청이 어우러져서 이루어진 것이지, 러시아 장군 사이의 막장 행보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뻥"이 믿어지게 된 경위가 신화 만들기의 전형적인 패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군은 군수 보급부터가 엉망진창인 것도 사실이었고, 전투에 참여한 두 러시아군 장성 사이에 약간의 흑역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만으로는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것은 바로 당시 독일인들의 러시아에 대한 시각(혹은 믿음)이다.
이 이야기에서 플롯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사단장이라는 사람들이 부하들 보는 앞에서 주먹다짐을 하거나, 사심에 이끌려 작전을 전개하는 등의 막장 행보다. 이 부분이 없으면 사실(史實) 모음은 되도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이 신화에 화룡점정을 하는 것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러시아 = 총체적 막장")이다.
사실 이런 류의 신화는 굉장히 많다. 의자왕이 삼천 궁녀를 거느리고 향락에 빠져 살다가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전설도 그렇고, 프랑스 혁명에 불을 붙인 것은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의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라는 명언(?)때문이라는 일화가 그렇다. 백제 멸망과 프랑스 혁명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이야기들이지만, 이들 역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진짜인 것처럼 퍼진 걸 보면, 후대 한국인들의 의자왕에 대한 시각, 혹은 프랑스 인들의 오스트리아 공주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거짓말 속에 숨겨진 진실
신화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대신, 신화를 입에 올리는 사람에 대해서만은 더 많은 진실이 있다. 그들이 가진 생각이나 믿음은 신화의 필수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런 데 눈을 기울인다면, 의외로 많은 것을 건질 수 있다.
덧붙이자면,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군이 "타넨베르크 전투" 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결국 "드라마틱한 이야기 만들기" 의일환이다. 전투가 실제로 벌어진 곳은 타넨베르크가 아니라 알렌스타인Allenstein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타넨베르크는 14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의 군대가 튜튼 기사단을 패배시킨 곳이다.그리고 독일 제국은 역사적으로 그 뿌리를 프로이센 왕국에, 다시 그 전신인 튜튼 기사단에 둔다. "타넨베르크 전투" 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 전투는 단순한 대승을 넘어서 "독일 민족의 오백년 묵은 복수극"2 이 된다.
그들 역시 신화 만들기의 본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인간의 본능은, 이렇게 오묘하다.
그들 역시 신화 만들기의 본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인간의 본능은, 이렇게 오묘하다.
→ 그래서 가카께선 <신화는 없다>는 책을 내셨던 거군요!!! -ㅁ-!!!
오오 가카 오오..
어라? 그게 뻥이었어요? 전 그게 정말인 줄 알았어요. 의외로 자세한 책의 내용중에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어서 그렇게 알았지요. 좀 더 알아봐야 겠군요
아! 들어가서 읽어보니 일단 주먹다짐 한 것이 뻥이라는 것이군요. 물론 불화로 인한 전략적 오류도 거짓이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죠.
예,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꽤나 권위있는 분들이 쓴 이런저런 책들에도 사실처럼 버젓이 나와 있는 이야기이니, 오히려 사실을 정확히 아시는 분들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화’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문맥(Text)이니 맥락(Context)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번 종교 정치학 시간(이라기 보다는 종교학에 가까운;)에 배운 내용인데, 텍스트 그 자체로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맥락을 통해서 더 완전한 의미를 형성한다고 하더군요.
그렇죠. 제 포스트의 주요 내용은 “신화를 통해 당시의 맥락을 짚어낼 수 있다.” 정도 되는데, 레비아탄 님이 반대쪽 측면을 짚어주셨군요.
예를 들어서, 고대 게르만 신화에는 “안드바리의 반지” 라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가진 자에게 부귀영화를 주지만 죽음의 저주를 주는 반지 이야기인데요, 이러한 전설의 배경에는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반지란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는 맥락이 숨어 있습니다. 이걸 모르면 게르만 신화의 하고 많은 이야기 중 왜 안드바리 이야기가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지요. 물론, 맥락 위에 있는 것이 저 유명한 <반지의 제왕> 일 거구요.
개인적으로 저는 소년 점프식 영웅담 만화(드래곤볼, 바람의 검심, 나루토, 강철의 연금술사…)나 서양의 슈퍼 히어로 코믹스, 한국의 조폭 코미디와 같이 반복되는 이야기 형식 또한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신화들이 가지고 있는 맥락에 대해서 고민중인데, 완성이 되면 블로그에 올리도록 하죠.
제가 못다한 이야기까지 잘 해주셨네요. 좋은 글 걸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도 알게 모르게 자주 들르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댓글도 종종 달겠습니다.^^
앗, 채 본좌께서 제 블로그에 행차해 주셨군요.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대는 다릅니다만, 저 역시 타넨베르크 전투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정리가 되면 언젠가 한 번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채 본좌님 블로그에 드나든 건 꽤 오래됐는데 제대로 쓴 글을 트랙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
그래서 고대 신화는 현재 알려진 사실을 상기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지영.
그렇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