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의 해부학: 신라·가야 종장판갑, AD 4세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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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의 여명
가야사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3세기 후반이 가야 역사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데 대개 동의하고 있습니다. 가야의 역사를 변한의 역사와 굳이 분리하는 이유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국가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국가발생이론에서 국가의 탄생을 설명하는 데 빠지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생산력의 발전과 보다 고도화된 폭력의 등장입니다. 생산력의 발전은 정치 집단의 등장을 부르고, 생산 수단1을 놓은 이들 사이의 투쟁과 통합은 계급 사회를 출현시키면서 국가 시스템을 형성합니다.
1990년 발굴이 시작된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폭력의 고도화와 계급 분화를 잘 설명해주는 유적입니다. 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금관가야(가락국) 지배계급의 공동묘역인 이곳은 3세기 말을 기점으로 해서 큰 변화를 보여 줍니다. 우선 주인이 죽었을 때 노비나 가신을 죽여서 함께 묻는 순장 풍습2이 등장합니다. 사람 말고 소나 말 등을 희생시켜서 묻거나 칼을 꺾어 묻기도 합니다. 묘의 형식도 조금 바뀔 뿐더러 기존에 있던 지배층 무덤을 파괴하고 만드는 경우도 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별로 보이지 않던 폭력적인 성향의 유물들 - 무기, 갑옷 등 - 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지배 체제조차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입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경주지역의 사로국(→신라) 또한 금관가야와 다른 형식의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합니다. 김해 지역과의 정치적 분리를 암시하는 대목3입니다.
전쟁 기술의 발달
언제나 새로운 지배 체제의 등장과 동반하는 것은 전쟁 시스템의 발달입니다. 신라와 가야의 경우 두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기마 풍습의 등장이고, 또 하나는 전쟁 무기의 발달과 확산입니다.
3세기 말을 전후해서 금관가야(지금의 김해지역)에서는 말고삐, 재갈, 찰갑4과 같은 유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보병에 비해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기병이 전장에 등장5한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선비족이나 부여족, 흉노족과 같은 북방 기마족이 남하해 와서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금관가야를 건국했을 수도 있고6, 그저 문화만 수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특징은 무기와 갑옷의 발달과 확산입니다. 고대 한국의 대표적인 도검 형식인 환두대도는 이미 삼한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 시기를 지나면서 크기가 대형화될 뿐만 아니라 장식과 같은 세부 요소들 또한 눈에 띄게 화려해지고 세밀해지는 특징을 보입니다.
공격구가 발달하면 방어구 또한 발달하는 법, 고분에서도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철제 갑옷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최고 수장층의 무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보다 작은 무덤에서도 나옵니다. 전문적인 전사 집단이 출현하여 이들에게도 철제 갑옷이 지급된 것입니다. 이 갑옷(갑甲)들은 위아래로(종縱) 긴(장長) 철판(판板)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들며, 종장판갑(縱長板甲)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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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 사회인 만큼 보통 농토. 이따금 광산이나 항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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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경우, 가야의 영향을 받아 4세기 중엽 이후부터 순장 풍습이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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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지역에서 일어난 급격한 정세 변화가 진한사회에 영향을 미쳐 사로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들이 뭉치게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는 초기 신라가 금관가야에 비해 세력이 뒤떨어졌음을 암시하는 이야기들을 전하며, 갑옷 또한 경주지역보다 김해 지역에서 훨씬 많이 보인다. 금관가야의 양대 본거지에 위치한 국립 김해박물관과 부산 복천동 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갑옷 유물을 보유한 박물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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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죽판이나 철판을 끈으로 엮어서 만든 갑옷. 무겁지만 유동성이 있기 때문에 말을 타는 기병이 입기 적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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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 제 1호 고분의 경우, 가야에서 가장 오래된 말투구 등의 각종 말갖춤이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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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부여족 남하설이라고 하는데, 그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북방 기마족이 사용하던 청동솥 유물이 김해에서 발견된다. 2. 순장 등 장례 풍습 등에 있어서 북방 기마족과 많은 공통점이 보인다. 3. 말고삐, 등자 등의 유물에서 북방 기마족의 영향이 확인된다. ↩
저 토기 볼 때 마다 왜 항상 술잔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까요. 술잔이라면 선조들의 러브샷…
저런 류의 유물들은 실제로 제사 때 술을 따르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순장의 경우, 최고위 지배자가 수하들로부터 가장 확실한 충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선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우두머리 목숨이 다하면 그에게 봉사했던 사람은 전부 따라 죽어야 하니, 조선 왕들에게 단골로 등장하는 독살설 같은 게 나올 수가 없는 구조라고… 그렇게 보니 마냥 야만적인 풍습은 아니고 나름 합리성이 있더라구요.
어느 사회의 습속이든 모두 나름대로의 합리성은 가지는 법이니, 저런 풍습을 함부로 야만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건 그리 성숙하지 못한 태도겠지요. 영혁님 말씀을 듣고 잠시 생각해보니, 비슷한 룰을 가진 곳은 꽤 많습니다. 16세기 중국의 명장 척계광의 원앙진은 단위부대의 대장이 죽었을 때는 그 부대원 전원을 사형시키는 법을 가지고 있었고, 막부 말기의 검객집단인 신선조 역시 조장이 죽으면 부하들이 처벌받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저런 곳의 대장이 쉽게 죽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죽어라 싸우도록 독려하는 데 이만한 게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고보니 순장이라는 풍습이 주로 보이는 곳 또한 신선조 못지 않은 거친 환경이 많군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의 <바이킹 - 바다의 정복자들>에 보면 바이킹들의 순장 풍습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중국 대륙의 순장 풍습 역시 한국과 많이 다른데, 한 번 그 차이점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덧글 감사드립니다 :)
바이킹의 경우는 누군가 여자가 따라 죽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어린 여자 노예를 데리고 가서 죽인후 배에 화장했다고 합니다. 순장은 일종의 정치 권력의 재편성이니까. 새로운 시대를 열기에 좋은 풍습이었겠지요. 역사책을 볼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문명의 발달= 고도화된 폭력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1. 순장에는 틀림없이 그런 의도도 조금은 있었을 겁니다.
2. 순서가 뒤집어졌군요. 고도화된 폭력이 계급 사회를 발달시키고, 거기에 따라 문명이 성립하는 순서지요. 고도화된 폭력 수단이 없는 미개 부족들은 자체적인 문명/국가 시스템을 정립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총,균,쇠》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그 책에서, 기후의 영향->기술발전->인구증가->폭력의 발전 이라는 경로가 설명돼 있었거든요. 물론 이 책의 핵심은 자연환경의 영향이 어떻게 각 대륙 사회 발전 편차를 낳았는가지만요. – 생산력의 발전과 보다 고도화된 폭력의 등장이라는 표현을 보고 생각나서 남깁니다. ^^
예, 사실 저 부분은 초기국가발전론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만, 일반적인 총론과는 달리 지역별로 각론에는 꽤나 차이가 날 겁니다. 사실 저는 그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