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월도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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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가 종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드라마를 보지 않습니다만, 워낙에 화제가 되다 보니 조금씩 동냥으로나마 듣고 보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이 드라마에서는 언월도(偃月刀, 줄여서 월도月刀)가 꽤나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악역 철웅(이종혁 분)이 월도 시범을 보이는 장면도 보이고, 주연인 송태하(오지호 분)는 아예 월도를 들고 다니더군요. 드라마의 배경이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정말 감탄할 정도로 센스있는 고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그 때는 월도의 전성시대였거든요.
기원: 대기병 병기
월도처럼 긴 손잡이 끝에 칼날을 장착한 병장기를 대도(大刀)라고 합니다. 그 기원이 중국 전국시대(BC 403 ~ BC 221)의 피(鈹)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 굉장히 오래된 무기인 셈입니다. 당나라(618 ~ 907) 때 지금의 형태가 갖춰진 대도는 송나라 시대(960 ~ 1279)에 그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월도는 대도류 병장기의 대표적인 무기[^1]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 당나라 시대에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칼날의 모양이 반달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 시대의 월도는 대부(大斧)와 함께 중무장 보병들의 주요 무기 중 하나였습니다. 중장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데 유용했거든요. 당시 송나라의 주적은 요나라와 금나라였는데, 이들은 모두 말까지 감싸는 갑옷을 장비한 중장기병을 핵심 전력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송나라도 중장기병을 육성하고 싶었지만 말이 모자랐기 때문에, 월도와 대부로 무장한 보병으로 중장기병을 격파하는 방식을 발달시키게 된 것이죠.
하지만 원나라(1271 ~ 1368) - 명나라(1368 ~ 1644)를 거치면서, 월도는 점점 그 인기를 잃게 됩니다. 화약 병기의 발달은 중장기병을 과거의 유물로 만들었고, 자연히 크고 무거운 월도 역시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나라 시기가 되면 월도는 실전용 병기라기보다 의장용이나 무예 시범용으로 더 많이 사용되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도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아서, 적어도 고려 중기 이후의 월도는 대개 의장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2]됩니다.
월도는 이렇게 잊혀져 갈 뻔... 했습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새로운 용도를 얻어 부활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바로 임진왜란입니다.
평양성 전투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사정없이 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사태의 주요 한 원인 중 하나는 일본군의 전투 시스템이 일방적으로 발달해 있었다는 겁니다. 전국 시대의 난장판을 겪은 일본군은 조총과 일본도(왜검倭劍)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 무기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노하우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군은 지나치게 궁시에 의존하여 육박전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우 계획적으로 진격하면서 총포에 더하여 일본도의 위력으로써 맹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에, (탄금대의)조선군은 싸움터를 버리고서 도망쳤다.
- 루이스 프로이스,
사정없이 밟히던 조선 육군을 구한 것은 명나라에서 보내 온 구원군이었습니다.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을 묵사발로 만들어버리고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것이 명군 기병들이 사용한 언월도였습니다. 일본도의 공격력은 당대에도 잘 알려진 바였습니다만, 커다란 언월도 칼날의 공격력 또한 막강한데다 사정거리는 일본도보다 훨씬 길거든요. 실제로 국립 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에는 월도를 들고 돌격하는 명나라 기병이 묘사되어 있고, 에서도 "왜인이 칼을 사용하는 신묘함도 언월도의 재빠른 솜씨 아래에서는 달아날 곳이 없으니, 칼 가운데 제일이라 하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조선 정부 또한 월도의 막강한 전투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정부는 평양성 전투에서 보여 준 명나라의 각종 군사기술들 - 화약병기, 보병전술 등 - 을 배우는 데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3], 월도에 보여진 높은 관심은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임진왜란중에 기록된 선조실록에서도 병사들의 훈련에 대한 논의에서 언월도를 사용하는 명나라 장교에 대한 언급이 보이고[^4], 조선의 병법학자였던 한교(韓嶠)가 1612년 집필한 에서도 언월도를 기병이 돌격할 때 사용하는 무기라고 언급[^5]하고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
월도에 대한 관심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정조실록[^6]은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이 무예에 관심이 많아 한가한 날이면 말을 타고 청룡언월도와 철퇴를 수련하였다는 내용을 전합니다. 이에 따르면 무예를 좋아했던 사도세자 또한 월도를 잘 다루었는데, 어지간한 장사들도 다루기 힘들었던 효종의 청룡언월도와 철퇴를 15, 6세에 이미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언월도가 웬만한 사람은 다룰 수도 없을 정도로 무거운 무기였다는 점을 감안[^7]하면, 이건 정말 굉장한 수준입니다.
월도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은 정조 14년(1790)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입니다. 조선 무예서적의 종합 완성판으로 불리는 이 책은 모두 4권으로, 그중 3번째 권에서 월도의 제원과 보병과 기병이 월도를 쓰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월도는 현대 길이로 대략 190cm 가량의 길이를 가지며, 그 중 칼날의 길이는 약 58cm가 됩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유물에서는 전체 길이가 2m를 넘어가는 게 더 많습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청룡언월도의 경우 그 길이가 230cm나 됩니다. 그만큼 월도가 큰 무기였다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언월도를 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궁중유물전시관을 추천합니다. 현존하는 월도의 상당수가 여기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경우 현재 월도를 전시하고 있지 않고, 육군박물관은 일반인이 가기엔 좀 불편합니다. 최근에는 가보질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전시는 하고 있지 싶네요.
, 전쟁기념관, 2004
- 전쟁기념관 개관 10주년 기념전시회 도록.
경인미술관, , 국립 민속 박물관, 2003
- 2003년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연구용역 보고서. 에 수록된 무기들을 중심으로, 당대 무기의 크기가 현대 도량형으로 환산할 경우 어느 정도가 되는지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다.
, 경인미술관 & 고려대학교 박물관, 2009
- 2009년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도검 특별 전시전의 도록.
한명기, , 역사비평사, 1999
- 조선과 중국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임진왜란 역사서.
육군박물관, , 2004
Louis Frois,
(국립 진주박물관, , 부키, 2003)
- 예수교 선교사였던 포르투갈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 천주교 포교사. 임진왜란을 포함한 전국 시대 말기를 다루고 있다. 국내에는 임진왜란 관련 부분만 따로 엮어져 나와 있다. 임진왜란을 다룬 당대의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평가된다.
요코야마 미쓰테루, 제 28권, 대현출판사, 1996
- 너무나도 유명한 만화 삼국지. 본문에서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의 모습은 154쪽에서 인용했다.
안녕하신가, 힘차고 강한아침! 만약 내게 묻는다면 나는 월도!
궁중유물전시관이라면 국립고궁박물관과는 다른 데인가요? 국립고궁박물관 거기는 월도를 못봐서…
개인적으로 월도 제일 많이 본데는 논산에 있는 개태사 정법궁이었습니다. 거기 보면 가운데 통일기원불상이 있고 오른쪽과 왼쪽(보는 사람 기준)에 각각 단군과 관우가 모셔져 있는데, 관우영정 주변에 의례용으로 보이는 언월도들 서너개가 그냥 이리저리 굴러다니더군요;;; 그 외에도 우리나라 각지의 관왕묘 등에 상당히 잘 만들어진 언월도가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관왕묘들이 관리 소흘로 부서지거나 해체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어디로 갔을지 원;;; 전주 관왕묘만 해도 거기 있는 신장상 중 활과 언월도를 든 신장상이 있엇는데 그거 철거되면서 그 뒤로는 소식을 못 들엇네요;;;
고려도경은 개인적으로 군사부분은 그닥 신뢰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일단 서긍 자체가 문관이었는데다(더욱이 송의 무관멸시는 쩔죠;;;) 고려의 활이 힘이 약하다고 하고(한국 활 성능을 알고서도 그렇게 썼는지 아니면 일부러 폄하했는지;;;)더욱이 중국 사신이 와서 의례를 벌이는데 의례시 사용하는 의장용 무기들이 실전용 무기와 얼마나 같을지도 의문입니다. 혹은 고려 조정에서 송나라 측이 불쾌감을 가질 것을 우려하여 일부러 무기들을 잘 보여주지 않거나 약한 척을 햇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고려말기 군 제도와 유사한 조선 초중기 군사제도를 봐도 장검/협도 등이 등장하니 말이죠.
사족이지만 몽골 침략시기 몽골군을 썰어버렸다는 대우포도 개인적으로는 월도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칼 디자인이라면 성 위에서 올라오는 적 베기는 좀 힘들 테니까요.
1. 고궁박물관이 맞을 겁니다.
2. 세종실록 등에 장도/협도가 등장합니다만, 대개 실전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너무 얇아서 파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말씀대로 성벽 올라오는 몽골군 손모가지를 날리는 데는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역시 고궁박물관이었나요;;; 실은 제가 지난 겨물에 거길 다녀왔는데 무기 자체는 별로 없어서 말이죠.
다만 칼날이 얇다고 실전성이 없다고 보긴 힘들다고 봅니다. 당장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등장하는 월도류의 원형인 곡도를 봐도 그렇게 두꺼운 편은 아니며, 일본의 나기나타 역시 중국의 언월도 수준은 아니죠. 더군다나 조선 초중기 현제에 엄연히 검수가 존재하며, 조선후기 문헌에도 한국의 월도가 실전성이 높은 이유로 얇고 중국 것보다 가벼운 점을 꼽으니까요. 과거 송나라 때처럼 중장기병 상대에 특화되지 않는 한 꼭 무겁고 두꺼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서긍이 고려에 대도가 없다고 한 거는 송나라 기준이엇즈리도 모르겟네요. 송나라 월도에 비하면 고려의 월도는 조선 초 장검을 기준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얇고 가벼웟을 테니 말이죠.
임진왜란 당대 병법서를 다시 읽어보세요. 전문가들도 대체로 조선 초기 월도는 그리 실전용으로 쓰인 것 같지 않다는 의견이 대세입니다.
근데 추노의 진정한 주인공은 공스나 업복이
하하, 공스나 인기는 정말 대단하군요. 주인공들보다 더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런칼을 실제로도 많이 썻군여, 곡선이 아름답네여
당당한 아름다움이 매력이죠.
흠…무예 24기 최형국님 쪽 주장과는 부분적으로 상충하는 주장이 존재하는군요. 알겠습니다.
저기 말이죠.
역사서의 말이라고 그게 전부 진리인 건 아니죠.
서양 사학자 말을 인용하시기도 했는데
실지로 병장기의 길이 차이가 가지는 유불리는 생각보다 압도적입니다.
중국에서도 창은 백일 도는 천일 검은 만일의 수련을 해야 고수가 된다고 하는데
실상 재능이 같다면 검을 10년을 수련해도 창 1년한 사람에게 지죠.
이건 일본의 장도가 검 에게 이기는 것과 같습니다.
일본이 검을 주력으로 사용했나요?
검은 보조 무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사학자가 임난에서 왜검을 덜먹이는 건 그 사람의 무식의 소산이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70%가 화살에 맞아죽고 (일본 기준으로도) 훈족, 몽골족, 여진족 등의 압도적인 무위를 자랑하던 군대들은 단순히 기마병이 아니라 궁기병과 궁에 있습니다. 한국의 활도 그 계열이죠.
백병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진 않습니다. 접전 보다 후퇴지 더 많은 사상자가 나는 게 상식이죠.
이런 걸 보면 무예도보통지 같은 것도 중국 한족의 책을 애궐복궐해서 구해 참고한 걸로 아는데, 북방기마민족의 마상무예(마상재는 임난 중에도 행한 기록이 있음)나 왜검이 실려있다 해도 그다지 뭐 대단한 걸로 안 보입니다. 아니 여진의 청이 멸망시킨 한족의 병서를 참고한다? 정조 당시 실학이니 뭐니 하지만 실상 후대에 만든 이름이고 그나마 덜 꼴통인 사대부죠. 북학의에서 박제가는 우리는 중국어 써야한다 이딴 말도 하니까
님아 역사 기록의 일부분으로 그게 전적으로 옳다고 보는 건 아니죠.
앞에 말했다시피 상식선에서 검이란 건 의장용이나 보조용이지 절대 그렇게 실전에서 유리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의 사무라이의 검을 숭배하는 전통이 강한 게 있어 검을 강조하는 거죠.
임란은 실제 군인이라 할 수 있는 상비군 병사수가 5000도 안 됐습니다.
그나마도 신립이 정예 기병 3000을 비온 논에서(기병을 쓸 상황이 아니죠) 삼단사법? 조총병의 딜레이를 줄이는 전법에 꼴아박아 몰살 당했죠.
농병일치라 하지만 그게 제대로 이뤄져 훈련이 잘된 것도 아니고 그냥 민간인이고
무술에 대해 심각한 판타지를 가지는 면이 정도의 차이뿐 많은 듯 한데
특히나 활을 무시하는 부분에서 더더욱 그런 걸 알수 있네요.
상식
보병 백병전으로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는다.
후퇴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원거리 무기에 맞아 죽는 숫자가 70%다(일본기준으로 봐도)
이건만 봐도
굳이 우리의 장점인 기병(조선의 마상재는 중국과 일본에도 유명, 상비군의 2/3이 기병)과 합성궁(궁기병에게 보병은 사냥감에 지나지 않죠.)의 장점을 못 살린 국방운영의 문제고 굳이 자신의 장점을 모르고 중국 병서나 찾고 자빠진 건 많이 판단 오류죠.
임란은 무술의 문제도 아니고 (무식한 서양사학자가 말하는 것 처럼) 왜검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아예 제대로된 병사의 질과 양에서 앞도적으로 차이가 난 겁니다.
일본은 거의 직업군인고 경험 많은 베테랑이 즐비하고 조선은 실질 전력인 상비군의 숫자 조차 10000이 되지 않은 겁니다.
왜구가 칼을 잘쓰네 무슨 소림사 고수들이 패했네 하는데 소림사 고수? 거품끼고 실력이 없는 거지. 그럼 과장이 붙었다 전제해도 10배의 병력의 왜국를 몰살시킨 이성계의 가별초 병사들은 소림사 고수들 보다 엄청난 실력이겠네요.
굳이 이런 글들 보면 자국의 역사에 대해 낮게 평가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무슨 실학자니 해도)들의 좁은 사고관의 한계를 고려해야죠.
명이 망하고 나서야 우리가 소중화다라며 우리가 해보자고 하며 그 때사 등장하던 게 진경산수화고 판소리 입니다.
무예도보통지도 보면 말이죠. 정조가 그걸 편찬한 사람이나 조선세법이(우리에게서 중국으로 넘어간) 사라진 건줄 알고 병사들 사이에서 비슷한게 남아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압니다.
예시로 드신 몽골 기병 같을 경우도 충격력을 유지하기 위해 편제의 20~30%는 중장 창기병으로 두었습니다. 신립의 기병대 역시 결정적으로는 창기병이 편제되어있지 않았던 탓이 큽니다.
임진왜란은 군대와 군대가 마주치는 회전 상황이 많지 않았고, 소규모 접전이 많았기에 단병접전이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거기다 일본군 전술이 철포사격 후 흐트러진 적 전열에 난입해서 단병접전을 거는 것이라서..
그렇기 때문에 척계광의 원앙진 역시 이런 단병접전을 막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실제로 효과를 거둬서 조선 역시 항왜로부터 총포술과 검술을 습득하는 한편 이러한 원앙진과 같은 전술을 수입하는데 노력을 기울입니다.
조선군이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보급한 무기가 월도나 편곤같이 익히기 쉽고 왜검에 대항하기 좋은 무기였다는 것을 보면 일본군의 백병전 솜씨가 얼마나 조선에 큰 충격을 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 진짜 비로그인 댓글 막든지 해야겠다. 왜 이렇게 뻘소리가 많아.
헐…. 자비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