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를 꿈꾸던 두 청년은

20년이 지나 다시 만났다.

정 반대 운명으로...

1.

누가 참호전을 예견했던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참전국들은 모두 상황을 낙관했다.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길어봤자 몇 달이면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겠지 - 그게 착각임을 깨닫게 되는 데는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시원하게 프랑스 영토로 치고 들어간 독일군은 파리를 목전에 두고 주저앉아 버렸고, 양군은 모두 참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전쟁은 끝없이 밀고 당기는 지리한 참호전만을 반복했다.

1915년, 한 독일 청년이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그의 이름은 오토 딕스(Otto Dix). 미대생이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 그 해 가을과 겨울에 걸친 참호전은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이듬해 7월 그는 솜 전장에 있었지만, 이번에도 전사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또 살아남았다. 47만 구의 시체를 헤치고.

2.

"전쟁 트립티콘(War Triptych)". 캔버스에 유채. 1929 ~ 1932년.

십여년 뒤 그가 그린 그림이다. 트립티콘은 삼단 제단화라는 것으로, 예수의 수난을 그린 종교화다. 아침에 십자가를 지고 나간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 매달리고, 죽어서 묻히는 과정을 네 칸으로 나눠서 그린다. 삼단 제단화 자체는 중세시대 이후로는 잘 그려지지 않지만, 딕스는 전쟁에 끌려나온 보병의 하루를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견하여 표현했다: 아침 안개를 가르며 전장으로 나간 병사는 종일 지옥의 전장에서 시달리고, 결국 시신이 되어 묻힌다.

"왜 이렇게 끔찍하게 그렸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대답했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지요." 훗날 그는 이렇게 술회하곤 했다: "당신이 인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런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어야만 한다." 전장에서의 경험이 작품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능히 짐작케 하는 한 마디인 셈이다.

3.

전쟁이 지리하게 이어지자 코너에 몰린 것은 독일이었다. 오랫동안 전쟁 뒷바라지를 해야 할 마당에 영국 해군에 의해 해상마저 봉쇄된 탓이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기존의 전술을 일신한다. 적진을 뚫고 적 사령부로 돌진하는, 돌격전 전문 부대를 창설한 것이다. 스톰트루퍼는 그렇게 탄생했다.

"독가스 아래서 돌격하는 스톰트루퍼(Stormtroops Advancing Under Gas)". 에칭. 1924년.

딕스도 스톰트루퍼였다. 보직은 소총수. 그는 전쟁에서의 경험을 풀어넣는 에칭화들을 남겼는데, 위 그림은 그들 중 하나다. 방독면을 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를 생물체들. 도저히 인간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수천만 명이 죽고 불구가 되는 전쟁을 하지도 않을 거고, 거기서 살아돌아오기도 힘들 게다.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경험을 한 사람은 감히 그 기억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한다. 전쟁 체험담이 의외로 디테일이 떨어지는 이유다. 하지만 딕스가 겪었던 악몽만은 그림으로 남았다. 그리고 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어두운 기억을 증언한다. 물론, 진짜 악몽에는 비할 바가 없겠지만.

4.

결국 독일은 전쟁에서 졌다. 엄청난 액수의 전쟁 보상금을 강요받은 독일에 남은 것은 몇 없었다. 한심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경제. 전국에 흘러넘치는 실업자들과 상이 군인들. 무엇보다 국가적인 규모의 모욕감이 독일 전역을 감쌌다.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딕스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프라저 거리(Prager Strasse)", 캔버스에 유채, 1920년.

최근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지만, 독일에서는 사람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다. 그런데 그 뒷배경이 사뭇 서늘하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팔다리가 잘린 상이군인들이 워낙에 넘쳐나서 관련 기술이 발달했고, 그것이 결국 한사람 한사람 발에 딱 맞는 신발을 만드는 기술로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우리야 정교하게 만들어진 독일제 신발을 보면서 놀라지만, 그 이면은 시궁창이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끔찍하다.

이 그림은 그 뒷모습을 화폭에 옮긴 것이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두 명의 퇴역 군인. 팔다리가 없다. 그들이 앉아있는 프라저 거리는 드레스덴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였다고 한다. 서울로 치면 압구정동이나 강남 정도? 하지만 전쟁 전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다. 의수와 의족을 파는 가게 앞에서 상이 군인들이 구걸을 하고 있을1 뿐. 자존심 강한 프로이센 귀족 장교가 구걸로 연명해야 했던 시절, 이런 풍경은 비단 드레스덴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 게다.

눈길을 끄는 것은 왼쪽 아래 구석에 그려진 개가 물고 있는 신문이다. "유태인은 나가라!!" 자존심이 상한 독일 국민들에게는 분노를 뒤집어씌울 상대가 필요했다. 희생자로 걸려든 것이 조국 없이 떠돌던 유태인들이었다. 위대한 독일 민족이 전쟁에서 질 리가 없다. 이건 다 배신을 한 유태인들 탓이다. 유태인들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연합국에 복수를 해야 한다 - 이런 주장이 음침한 뒷골목을 벗어나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퇴역 군인들의 카드게임(Card-Playing War Cripples)". 캔버스에 유채. 1920년.

딕스가 전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한 점 더 있다. 카드를 하고 있는 상이용사들을 그린 그림이다. 역시 팔다리가 없지만, 앞 그림의 상이용사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사람이라기보다 차라리 터미네이터에 가까운 모습이다. 새로운 전쟁을 꿈꾸는 사회 분위기를 감지했던 것일까? 반성을 모르는 극우 언론들이 반유태주의를 부추기며 민족주의를 선동하던 무렵, 그의 그림들은 말없이 경고를 날린다: 현실은 이랬노라고. 그리고 조만간 이 꼴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

5.

운명의 장난일까? 같은 시기, 또다른 화가 지망생도 전장에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오스트리아 국적이었지만, 전쟁에는 독일군으로 참전했다. 그의 보직은 연락병이였다. 전쟁 전에는 미대 입시에 실패하고 빈둥거리던 잉여일 뿐이었지만 군대에서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용맹한 모범 사병으로서 네 번이나 훈장을 받았23다.

1918년의 히틀러 상병을 그린 그림. 사진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김태권 작. http://hook.hani.co.kr/blog/archives/9221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그의 삶은 딕스의 그것과 현격한 대조를 보인다. 제대한 그는 나치라는 극우 정당에 가입했다. 그가 입당했을 때만 해도 나치는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를 외치던 수많은 극우 정당들 중 하나 - 한마디로 듣보잡일 뿐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놀라울 정도의 웅변가였고, 유태인을 박멸하고 동유럽으로 영토를 넓히자는 그의 주장은 점점 더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1933년 수상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총통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다.

1937년, 드레스덴을 방문한 히틀러는 딕스의 그림을 만난다. 그리고 한 마디: "이런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 수치스럽다." 화가 출신이라 그런지, 딕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정확히 알아봤던 모양이다. 과연 딕스의 작품들은 이후 조리돌림을 당하기 위해 독일 전역에서 순회 전시된다. "애국심을 갉아먹는 타락한 예술" 이란 이유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그들의 운명은 다시 뒤집어졌으니, 현재 딕스의 작품들은 표현주의 예술의 걸작으로 추앙된다. 반면 히틀러는 역사상 최악의 정치 지도자로 이름을 남겼다.

6.

딕스와 히틀러의 상반된 이력을 본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도척과 유하혜의 일화였다. 유하혜는 공자의 친구로 이름이 높지만, 그의 동생 도척은 살인과 약탈을 밥 먹듯 저지른 악당으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이 일화는 너무나도 다른 형제를 다룰 때 자주 이야기된다.

그런데, 그 일화가 동양에서만 통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히틀러와 딕스는 젊어서 비슷한 꿈을 꿨고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20년 뒤 그들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뭐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답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만큼 인간이 복잡한 동물이라는 반증이리라.

* 오토 딕스의 작품들 더 보기(artsy.net)

ps) 제목보고 이 스톰트루퍼 떠올린 사람이 더 많다에 50원 건다.

참고문헌

  • 노르베르트 볼프 저, 김소연 역, '표현주의', 마로니에 북스, 2007

  1. 잘 보면 오른쪽에 걸린 의수와 의족 사이에 작가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2. 그러나 그가 하사관으로 승진하지 못한 데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리더십이 모자라서였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오스트리아 국적이어서 그랬다는 설이다. 스스로가 진급을 원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는데, 히틀러의 군생활은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워낙에 자료가 없어 실상을 밝히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히틀러의 군생활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려져지 않은 점이 많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독일군 연락병에는 연대 본부와 전장을 오가는 보직과 전투중인 대대 사이를 오가는 보직이 있었다고 한다. 전자라고 해서 마냥 편한 자리는 아니었겠지만 후자처럼 참호와 기관총 사이를 오가는 극도로 위험한 임무에 비하면 훨씬 안전하다.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소총수와 비교해도 마찬가지.) 히틀러는 전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