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3와 SC2 사이

스타크래프트2(이하 SC2) 싱글 캠페인이 재미있다고 하시는 분들 많으시더군요. 많이들 기억하십니다만, 10년 전 SC가 나왔을 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쉽게 클리어할 수 있어서 재미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죠. 오죽 했으면 게임 못하는 친구를 "SC 싱글 캠페인 엔딩도 못 보는 인간" 이라고 불렀을 정도니까요(...). "도저히 할 게 없어서 싱글 캠페인을 했다." "클리어하면 나오는 동영상 보려고 한다." 는 말도 자주 하곤 했었죠.

어쨌거나 싱글 캠페인은 SC에 있어서 옥의 티가 되어 버렸습니다만, 이건 SC 개발진만의 탓도 아닙니다. 전작인 WC2 때까지만 해도 RTS 게임은 싱글 캠페인이 주 컨텐츠였거든요 - 한창 멀티플레이가 성장하고 있기는 했지만요. 그래서 당시의 싱글 캠페인은 미션 수도 많았고, 멀티플레이를 위한 튜토리얼로서의 기능은 오히려 부가적인 것에 가까웠죠. 유닛도 별로 없는 WC2가 확장팩을 제외하고 미션이 20개가 넘었으니까요.

Warcraft 2

하지만 SC에 들어오면서, 이게 덜컹 뒤집어져버린 겁니다. 뒤집어지고 엎어지는 재미가 있는 멀티플레이에 비해, 싱글 플레이는 도저히 주 컨텐츠가 되질 못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유닛 왕창 뽑아서 밀어" 수준에 가까웠거든요. 더이상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싱글 플레이에 남겨진 임무는 이제 유닛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튜토리얼에 가까워졌습니다.

4년 뒤, WC3가 출시되면서 이런 안습한 상황은 다소 개선되었습니다. 게임 컨셉 자체가 순수한 RTS라기보다 RPG 요소가 많이 강해진 덕분에 레벨 안에서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확장팩이 나오고 1. 난이도가 급속히 상향 조정되고 2. 다양한 아이템을 활용한 미션들이 등장하면서 싱글 캠페인은 다시 "꽤 할만한 것" 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WC3 확장팩의 NightElf 4번째 미션. 이 미션에서는 Shadow Orb의 조각이라는 아이템들을 찾을 수 있는데, Warden의 Blink 능력과 Huntress의 Sentinel 기능을 적절히 조합해야 모든 조각들을 찾을 수 있다. 조각들을 모두 모아 얻는 완전한 Shadow Orb는 공격력 강화 효과를 주기 때문에 그 후 캠페인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동기 부여의 기술

SC2 레벨 디자인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언급하자면 우선 WC3에서 등장한, "가능하면 유닛들의 특수 능력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레벨을 창조한다." 를 들 수 있습니다. 다만 RPG 속성이 강해서 영웅과 유닛들의 만발한 개성을 활용할 수 있었던 WC3에 비해, SC2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영웅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싱글 캠페인에서만 쓸 수 있는 다양한 유닛들이 등장하는 것이죠. 이러한 방식은 밸런스 문제로 멀티플레이에서 삭제된 아까운 유닛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어린이들 놀이방에 가보세요. 다양한 장난감이 있을수록 놀이방은 더 재미있습니다. 똑같은 겁니다.

싱글 캠페인 "대열차 강도" 에서 등장하는 코브라. 이 유닛은 한마디로 "무빙샷의 위ㅋ엄ㅋ" 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성취 동기를 자극하는 데 상당한 고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SC2에서는 WC3와는 달리 게이머가 달성해야 하는 과제 목록이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먼 옛날 Medal of Honor에서도 보인다는 점에서 새롭거나 참신한 시스템이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특히 xBox Live 시스템에서 보듯이, 게이머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컨텐츠에 몰두하게 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효과가 검증된 시스템입니다.

레벨들 또한 과제 달성 시스템의 효과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디자인 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SC2의 레벨들은 "한 번의 플레이만으로 해당 레벨의 모든 과제를 달성하기가 힘들다." 는 원칙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덕분에 게이머들은 엔딩을 본 뒤에도 과제를 모두 달성하기 위해서 다시 플레이를 하게 되죠. 여기에 대해서는 이전에 레고 스타워즈를 리뷰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좀 더 관심이 가시는 분은 심리학 책에서 자이가르닉 효과를 찾아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한 번에 클리어가 힘든 대표적인 미션, "위기의 뫼비우스". 시간이 워낙에 촉박하기 때문에 임무 목표를 모두 달성할 경우 "여기 사람 살려!"와 "헛걸음질"은 달성할 수 없다. (브루탈리스크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 사람 살려!" 와 "헛걸음질" 의 경우도 동시에 달성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역시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 살려를 달성하기 위해 낙오병들을 모두 구출할 경우 맵 위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헛걸음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맵 가운데 쪽 길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 스크린샷은 가운데 쪽 길을 통해 돌아간 모습을 찍은 것이다.

여기에 연관해서 살펴보자면, 시간 제한을 두는 미션의 비중이 늘어났습니다. 얼추 1/3이 넘고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것 같군요. 게이머에게 시간 압박을 줘서 게임플레이에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도 훌륭한 선택입니다만 아무래도 이렇게 되면 게이머가 한 번에 많은 과제를 달성하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새로운 수익 모델?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SC2의 캠페인은 향후 유용한 추가 수익 모델로도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미 Blizzard는 Wow를 통해서, 자사의 프랜차이즈와 그 세계관이 큰 수익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미 WC와 SC를 소재로 한 많은 만화와 소설이 등장했지요. 이런 외전격 컨텐츠는 추후 미니 확장팩 형태로 다운로드 판매가 가능합니다. Wow 패치들을 잘 보세요. 새로운 던전과 퀘스트가 추가되는 식이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Wow 스토리에 작은 외전 하나씩 추가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SC2에서도 충분히 그러한 방식을 시도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 xBox Live에서 이런 식으로 추가 컨텐츠들을 판매하고 있지요. 급속도로 올라가는 배틀넷 운영비와 개발비를 위해서라도 추가 컨텐츠의 발매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iBook Store에 올라온 스타크래프트 소설들.

추가 컨텐츠의 판매가 용이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이것이 배틀넷의 과제 달성 시스템과 찰떡궁합이기 때문입니다. 단방향적으로 진행되던 기존 RTS의 캠페인에 비해, SC2의 캠페인은 짐 레이너 임무부터 발레리안 멩스크 임무까지, 모두 7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임무에 해당하는 레벨을 모두 완수할 경우 "xxx 임무 달성!" 과 같은 과제가 달성되는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죠.

"어부지리" 미션을 클리어한 뒤 "대피" 미션을 수행할 경우, 불곰의 지원 사격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미션의 선택 순서에 따라 게임플레이가 달라진다는 점이 SC2의 묘미다.

이러한 시스템은 게이머가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게 하거나 스토리를 조금 더 심도있게 다루는 데서도 이점이 있습니다만, 게이머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강력합니다. "사라 케리건 임무" 하는 식으로 해서 악투러스 멩스크에게 버려진 사라 케리건이 어떻게 저그의 여왕이 되었는지 등을 확장팩으로 발매할 수 있다는 거죠. 이 확장팩을 클리어할 경우 "사라 케리건 임무 달성" 같은 업적 달성을 시켜 주면 됩니다. 새로운 확장팩과 연계시켜 기존의 캠페인도 다르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한다면 충분히 돈 내고 구입할 만한 컨텐츠가 될 겁니다. 수익 모델이라는 측면에서, 이 방향에 대해서는 블리자드의 행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라 캐리건 임무" 라는 가상의 확장팩이 발매될 경우 캠페인이 어떤 식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를 가정해 봤다. "?"는 분기, "V"는 확장팩 발매로 인해 새로운 유닛이나 이벤트가 발생한 임무를 가리킨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캠페인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다.

실제로 마이크 모하임 사장 또한 인터뷰에서 배틀넷을 통한 다양한 수익 모델을 고민중이라고 밝힌 바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러한 시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뭐 이걸 가지고 한국 언론들은 "블리자드, 배틀넷 유료화 검토" 같은 닭대가리 같은 설레발을 치긴 했습니다만.

총평

어쨌거나, SC2는 Blizzard의 솜씨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줬습니다. 김연아를 바라보는 다른 피겨 선수들의 심정이 이와 같은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