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엄청 살벌하지만,

흔히 모르고 지나치는 동화의 한 장면.

여왕은 사냥꾼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백설공주를 숲으로 데려가거라. 두 번 다시 저 꼬락서니를 보기 싫으니, 저 아이를 죽인 다음 그 증거로 허파와 간을 가져오너라."

사냥꾼은 백설공주를 숲으로 끌고 갔지만, 곧 어린 소녀가 가여워졌다. 어차피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힐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백설공주를 놓아 주었다. 대신 어린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그 허파와 간을 들고 갔다.

- 그림 동화, 『백설공주』

사냥꾼이라는 직업

중세의 사냥꾼이 농민들에 비해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생업을 위해 무기를 다룬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유혈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냥꾼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 또한 이 두 가지다.

아직 기사가 전쟁의 주축이던 중세 초중기, 사냥꾼의 군사적 능력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1200년대를 넘어가고 쇠뇌나 화승총 같은 투사 무기가 발달하면서 이들의 전략적 가치는 급상승했다. 사냥꾼들은 기사를 위협할 수 있는 이런 무기들을 자유 자재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집단 행동에도 익숙하다. 커다란 맹수를 사냥할 때는 혼자 잡는 게 아니라 여럿이서 힘을 합쳐 사냥감을 몰고, 한꺼번에 공격해서 잡는다. 현대 사회와 같이 정리된 훈련 커리큘럼이나 명령 체계가 없는 사회에서 이러한 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급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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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쇠뇌. 배경에 당대의 사냥 모습을 그린 그림이 보인다. (출처: flickr@mitko)

이들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유혈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전쟁터의 피바다를 처음 경험했을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최근 이라크 전쟁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듯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뾰족한 해답이 없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유혈에 익숙한 사람들은 충격을 덜 받거나 금방 적응한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인데, 대대로 사냥으로 먹고 사는 사냥꾼들은 이러한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냥꾼을 전쟁에 활용하는 것은 동서 고금에 예외가 없었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에서도 선봉을 맡은 부대는 사냥으로 먹고 사는 부족이었고, 조선시대에도 사냥꾼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전장에 투입한 기록이 있다. 근세 독일어권에서 사냥꾼을 의미하는 '예거(Jager)'라는 말이 아예 정예 보병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2차 세계대전기의 독일군 공수부대를 팔슈름예거(Fallschirmjager)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강하, 낙하'를 의미하는 '팔슈름(Fallschirm)' 과 정예 보병을 의미하는 '예거(Jager)'의 합성어이다. 그만큼 사냥꾼은 정예병의 대표주자였던 것이다. (* daewonyoon 님의 지적에 따라 독일어 발음 수정. 지적 감사합니다.)

공수되는 팔슈름예거. 1941년 5월, 크레타(crete) 공방전.

중세 유럽의 숲

그러면 사냥꾼이 백설공주를 끌고 간 곳 - 혹은 사냥꾼의 밥벌이 공간인 "숲"은 어떤 공간일까? 이 공간에도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일반인들이 얼씬도 하기 힘든 곳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왕이 모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유럽의 숲은 우리네 전래 동화의 산하고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일단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 고대 독일의 경우 전국이 거의 다 숲이었다고 하고, 중세 잉글랜드의 경우 영토의 거의 1/3 가량이 숲이었1다. 이 정도로 울창한 숲이면 운치 있다기보다 무서운 곳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인에게 산이 신령님이 사는 신성한 곳이라면, 유럽의 숲은 "교회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 = 악마가 사는 무서운 곳"에 가깝다. 서양의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마녀가 등장하는 곳, 악마와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숲 속인 게[^2]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무서운 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냥꾼이나 나무꾼 뿐이다.

사냥꾼이 백설공주를 죽이려 한 이유는

영화 『블레어 위치(1999)』의 한 장면. 한국의 산 속 숲도 호랑이가 나오는 무서운 공간이거나 산신령이 사는 민담의 공간이기는 마찬가지지만, 마녀사냥꾼이 남몰래 악마와 계약을 맺는 공포물의 배경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두 이야기는 심지어 실제 재판 기록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애당초 고대 게르만족은 숲 속에 있는 늪 같은 데서 인신공양을 하거나 했기 때문에 기독교화 된 이후로는 주민들이 해당 장소를 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럼 이 숲을 개간해서 농지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숲에 포함된 모든 사냥감과 목재는 국왕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삼림의 개간 및 경작도 허가가 있어야 할 수 있었고, 개간 후에는 왕실에 소작료를 바쳐야 했다. 사냥도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잡아도 되는 사냥감 - 혹은 현상금을 걸어 가며 사냥이 장려되었던 사냥감은 늑대 정도였다. 암사슴이나 수사슴, 멧돼지 등을 함부로 죽였다가는 사형당하거나 불구가 되었다. 작은 사냥감이라도 마음대로 잡을 수 있었던 사람은 영주 정도였다. 사냥꾼도 왕실의 명령이나 허락을 받아서 사냥을 해야 했다.

이쯤 되고 보면, "사냥꾼"의 캐릭터가 대충 그려진다: 그는 열 살 남짓한 소녀를 죽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정도로 살생의 전문가이며, 유혈에도 아주 익숙하다. 평소엔 사냥감을 납품하고 전시엔 우선 동원되기 때문에 일반 농민보다 왕실에 가깝다. 사냥을 하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여왕이 내리는 어떤 명령에도 복종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숲 속 지리에 밝아 쥐도 새도 모르게 시신을 처리하기에도 제격이다. 자, 여기까지 알고도 이 동화가 예전과 같이 보이시는가? 여왕이 백설공주를 죽이기 위해 보낸 인간은 저렇게 살벌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번역만으로는 전할 수 없는 것

흔히 우리 것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할 때, 번역만으로 전하기 힘든 게 많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외국 문화도 마찬가지다.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두세 줄 정도 등장하는 사냥꾼의 존재 자체가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Danny Danziger & John Gillingham, 『1215: The Year of Magna Carta』, Touchstone, 2004 (황정하 역, 『1215 마그나 카르타의 해』, 생각의 나무, 2005)

우리에게 단지 "민주주의의 시작" 정도로 지나치게 단순하게 알려진 마그나 카르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세 잉글랜드 정치 사회의 여러 측면을 고찰하면서, 이것들이 마그나 카르타의 조항 하나하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한다.


  1. 존 왕(1166~1216)의 시대 동안, 잉글랜드에 숲이 없던 지역은 노포크, 서포크, 켄트 세 곳 뿐이었다. 에섹스 지방은 아예 전국이 다 숲이었다. 단, 여기서의 숲의 의미는 지금하고 완전히 같지 않아서, 숲에 인접한 마을이나 소도시를 모두 포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