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첫 걸음은,
모순조차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
최강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최강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1를 읽다보면 떠오르는 질문들이다. 언뜻 뜬금 없어 보이지만, 이 질문이 의미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주인공 무사시가 소설 내내 추구하는 문제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이 문제들이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사시의 여정 전체가 이 질문들을 깔고 진행되기 때문에, 이걸 빼놓고 무사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2.
최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엔 두 개의 답안이 있다. 1번은 자신의 밖에서 답을 찾는 방식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다른 강자들을 하나씩 베어 나가는 것이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살아남아 상대를 베면, 그 와중에 실력도 늘고 강함도 증명된다.
반면, 2번은 접근 자체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이 방식은 칼을 휘두르는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 따르면, 사람이 칼을 휘두르는 것과 새가 나는 것은 그리 다른 행위가 아니다. 새의 몸 자체가 본능적으로 잘 나는 방법을 알고 있듯, 인간의 몸과 칼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이끌어내는 것이 최강을 향한 길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최강이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1번 방식을 따르는 사람에게, 최강이란 미칠 듯이 추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2번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최강 따위의 칭호에 집착을 가지는 건, 자기 자신을 보는 데 방해만 된다. 그러니까, 최강 따위란 그에게 한갖 말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이 두 답안은 이렇게 서로 완전히 모순되는 관계다.
3.
무사시의 이야기에서 진정한 최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모두 두 사람이 나온다. 인에이 할아버지와 야규 세키슈사이 할아버지2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보면, 모두 2번 방식이다. 1번 방식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이토 이토사이인데, 이토사이는 정작 세키슈사이에게 털끝 하나도 손대지 못했3다.
그러면 2번이 맞고 1번은 틀린 것일까? 재미있는 건 여기서부터인데, 1 없는 2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요시오카 도장의 당주 요시오카 세이쥬로는 날 때부터 천재라, 어려서부터 자신의 몸을 활용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안다. 2번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지막지하게 강하긴 했지만) 1번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밤낮없이 술만 푼다. 결국 그는 1번을 따르며 사선을 밥 먹듯 넘나들던 무사시에게 베여 죽는다.
그런가 하면, 1의 종착점은 2이기도 하다. 1번을 따르던 무사시는 이전에도 여러 번 이겼지만, 상당히 힘들게 이겼었다. 하지만 그렇게 레벨업을 거쳐 일정 경지에 들어서자,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칼을 휘두르는 2번 스타일로 변했다. 그 다음은? 이전의 상대들보다 훨씬 강한 세이쥬로를 베고, 그 동생 덴시치로도 베고, 결국 한꺼번에 몰려든 요시오카의 70 검객들마저 몽땅 베어버린다. 이렇게, 1과 2는 서로 완전히 모순되면서도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다.
4.
그런데, 이런 관계가 비단 검술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무사시 주변에는 불도를 닦는 다쿠앙 스님과 칼 장인인 혼야미가 있다. 무사시가 검의 길을 간다면, 이 두 사람은 부처의 길, 장인의 길을 간다. 이들의 앞에 놓여진 현실 역시 모순되기는 마찬가지다.
다쿠앙 스님이 가는 길은 중생을 계도하는 부처의 길이다. 이 길은 중생들이 현재 살아가는 방식을 부정하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찾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 길을 완성하려면, 그 중생들의 마음 속에 불심(佛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처의 길은 이렇게 서로 모순된 두 가지 방식을 요구한다. 두 모순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혼아미가 가는 길은 장인의 길이다. 칼을 만들고 다듬는 것이 그의 일이다. 칼은 엄연히 흉기인 만큼, 자신이 하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걸 돕는 일이라는 걸 인식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말에 의하면, 기술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려면 칼이 살인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 극한을 이끌어 내는 데만 생각이 미쳐야 한다고 한다. 장인의 길 역시 이렇게 서로 모순된 두 가지 방식을 요구한다. 여기서도 두 모순은 서로 의지하고 있다.
사실, 무사시/혼아미가 하는 일과 다쿠앙이 하는 일은 서로 정반대되는 일이다. 한 쪽은 사람을 죽이거나 그 도구를 만들지만, 다른 쪽은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일을 한다. 하지만 이 둘은 그 안에 모순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똑같다. 정 반대되는 동시에 서로 가장 닮기도 한 것이다. 사실 이것도 모순이긴 하다.
5.
나는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할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논리적 정합성과 논리적 모순이 엄연히 공존하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어줍잖은 지식만으로 인간 세상을 이해하려 드는 건 처음부터 무리인지도 모른다. 지식이란 정합성만을 추구할 뿐, 모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순을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러한 지혜가 없는 한, 지식은 외눈박이에 불과할 터다.
어떻게 보면, 모순을 부정하는 '지식'과 모순을 인정하는 '지혜'를 동시에 갖출 필요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일 수도 있다. 하기야, 논리 기계를 공부한다는 컴퓨터 공학도가 모순 같은 걸 옹호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모순인지도 모르겠다.
ps)
좋은 글. 마지막 한문장에 태클. 논리체계가 어느이상의 표현력을 가지면 그 안에서 참 거짓을 증명할수 없는 논리식이 등장하기 마련에요. 그런 논리식은 그냥 받아들일수 밖에 없죠. 논리의 세계에서 조차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있는데, 하물며 삶에서라야….
그건 모순이라기보다 “모르는” 거지. 사실 본문에서 다룬 건 플라톤적인 논리 체계일 뿐이고, multi-valued logic에서는 참도 거짓도 아닌 논리치를 인정하지. 여기서 모순을 인정하는 건 아닌데, 그 개념이 플라톤적 논리 체계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들었음. (뭐 솔직히 이 쪽은 발당이 니가 더 잘 알겠군.)
발당이 말따마나 논리의 세계에서도 “알 수가 없어 침묵할 수밖에 없는” 명제들이 끝없이 굴러나오는데, 나 역시 어줍잖은 논리 가지고 세상 모든 걸 안다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
모순이라…제 생각에는 모순이라기보다 하나의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각각의 과정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하여 정반대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 처럼
말씀하신 1,2번 역시 천하무적에 다가가기 위한 선택일 뿐 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 3번의 방식도 존재 할 수 있고요.만약 제 3의 방법이 있다면
오히려 모순이란 단어의 의미 역시 흐려질수 있겠네요…
제 생각입니다. 올리신 글을 읽고 간만에 몇자 적어 봅니다.
그럼 다음에도 좋은 글 부탁 드립니다. ^^
모순은 틀렸다는 의미, 혹은 그 이외의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둘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쓴 것 맞습니다.
올리신 글을 반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그냥 올리신 글을 읽고 제 생각을 적은 것 인데…
제가 올린 글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1과 2를 동시에 할테야!” 라고 생각한다면?
….ㅠㅠ
뭐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어떻게든 동시에 하게 되겠습니다만(무사시처럼요), 그것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