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를 믿으십니까?

저는 원죄를 믿습니다.

1.

『오이디푸스 왕』 공연. http://www.flickr.com/photos/glennwilliamspdx/5449787481

옛날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도시국가 테바이에 역병이 돌았다. 백성들이 연달아 죽어나가자,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델포이에 사자를 보내 신탁을 구했다. 몹쓸 돌림병을 그치게 할 방도를 알고 싶었던 거다. 마침내 돌아온 사자가 신의 뜻을 전했다: "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짝 삼은 자를 찾아 내면 역병이 그칠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 끔찍한 범죄자를 찾아내기로 한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사실, 그는 테바이 태생이 아니라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왕자였다. 하지만 어찌어찌 하다 테바이에 와서 왕이 된 것이었다. 그가 처음 테바이에 왔을 때, 테바이의 왕은 죽은 상태였으며 멀리서 날아온 괴물 하나가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괴물은 길가에 죽치고 앉아서 지나가는 이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그걸 맞추지 못면 잡아먹었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풀어 괴물을 퇴치하고, 백성들을 구한 공로로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그만큼 자신의 판단력에 자신이 있었을 법도 했다.

살인자를 뒤쫓는 내내, 오이디푸스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질문이 떠다녔다. 살인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과연 누구의 자식인가? 문제가 풀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인자는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다. 그는 전 테바이 왕의 아들이었지만, 버려져서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랐다. 자신이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불길한 예언을 듣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던 그는 길가에서 시비가 붙어 상대 노인을 때려죽인다. 그런데 실은 그가 테바이 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을 구한 공으로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선왕의 왕비(=자신의 어미)를 아내로 맞이해 오늘에 이르렀다. (*박하사탕님의 지적으로 수정. 지적 감사합니다.)

2.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고대 그리스, BC 5세기. http://www.flickr.com/photos/sebastiagiralt/5402517282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가 않다. 오이디푸스는 여러 모로 비범한 인물이다. 약간의 인간적인 결점이 있다면, 약간 성격이 급하고, 한 번 잡은 것은 끝을 보는 성격 정도다.

그의 성격은 그를 스핑크스를 퇴치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머리도 좋은 사람이 끝장을 보겠다고 덤벼들었으니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그를 파멸시킨 것 또한 그 성격이었다. 자신은 몰랐지만, 일단 테바이의 왕이 되는 순간 그는 속칭 "인생 막장 테크를 찍었다." 그나마 끔찍한 진실에서 눈을 돌릴 기회도 있었다. 대충 수사하고 손 놓으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끝장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 탓에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파멸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한때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자질들은, 이렇게 상황이 바뀌면서 그를 찌르는 흉기로 돌변했다. 그의 파멸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의 자질이야말로 그의 원죄였다.

3.

안드로이드를 걷어찬 삼성, 품에 안은 구글

이철호의 시시각각 - S급 인재를 걷어찬 삼성

소프트웨어의 역습 - IT한국에도 올 것이 왔다.

IT업계에 대형 뉴스가 터졌다. 구글이 모토롤라를 13조(!!)주고 인수했다. 안드로이드 OS를 공급하고 있는 구글이 제조사마저 집어 삼키니, 구글에서 OS를 공급받아서 스마트폰을 만들어 온 삼성이나 LG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분위기다. 마침 안드로이드가 원래 삼성의 것이 될 뻔했다는 사실이 언론지상을 통해 소개되면서, 삼성은 굴러들어온 복덩어리를 걷어찼다고 몇 배 더 까이는 분위기다. 이야기인즉슨, 안드로이드의 창시자인 앤디 루빈이 안드로이드를 팔러 먼저 찾아갔던 곳이 삼성이었던 것이다. 그 때 삼성이 퇴짜를 놓지 않았다면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아니라 삼성 것이 되었을 터다.

나도 삼성이 안드로이드를 놓친 것이 안타깝지만, 삼성이 욕을 들어먹을 이유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대세를 이룬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2005년 당시에 그런 트렌드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창시자인 앤디 루빈이 지나치게 비범했을 뿐인 것이다. 게다가 그 때 삼성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했다손 치더라도 안드로이드가 지금처럼 컸을 거라는 보장 역시 없다.

무엇보다, 삼성은 하드웨어를 만들기 위해 창업되서 하드웨어 장사로 성공한 회사다. 뒤집어 말하면 모든 사고 방식이 전부 하드웨어 중심으로 짜여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얘기다. 한 때 삼성을 하드웨어의 제왕으로 만들었던 자질들이 상황이 바뀌면서 자신을 찌르는 흉기로 돌변한 건 비극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필연이기도 하다. 삼성한테 구글처럼 소프트웨어를 잘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는 왜 도대체 삼성인 거니?" 라고 묻는 거하고 똑같다. 뭐 어쩌라고?!

4.

그 잘난 구글이라고 해서 다를까? 나는 구글의 팬이지만, 구글도 못 하는 게 있다. facebook 같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g+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 전까지 판판이 다 말아먹었다. 게다가 구글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디자인이 엉망이라고 까인다.

구글식 mvp 판단법: g+에 고어핀드 같은 geek들만 난무하고 멋진 아가씨들은 없다(...). https://lh4.googleusercontent.com/-j9fH4qwttJ4/ThGBp0sf1UI/AAAAAAAAAPc/jetqI0LpEuE/s800/google-vip.jpg

돈도 많은 회사가 왜 그러는 걸까? 구글은 수학자와 컴퓨터 공학자가 탄생시킨 회사다. "공돌이 본능"이 이 친구들의 본질인 것이다. 문화 자체가 감성을 국 끓여먹은 분위기이니, 멋진 디자인 혹은 감성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나올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웹 디자이너가 없냐는 말까지 듣고 있으니 정말 할 말 다 했다.)

한 때 구글을 검색의 제왕으로 만들었던 자질들이 상황이 바뀌면서 자신의 발목을 잡는 덫으로 돌변한 건 비극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필연이기도 하다. 어쨌든, 구글한테 애플처럼 디자인을 잘 이해하라고, facebook처럼 SNS를 잘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넌 오늘부터 구글 하지 마라." 고 하고 말지.

물론 고어핀드도 근본이 공돌이(...)인지라, 구글의 공돌이 본성을 지겨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하는 경우가 많다. 페르마의 정리를 테마로 한 구글 로고. 2011년 8월 17일.

5.

대체로, 사람들은 장점과 단점을 나눠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장점이나 단점은 실제로 같은 것인 경우가 허다하다. 같은 속성이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상황이 조금만 변하면, 어제의 무기가 내일 스스로를 찌르는 흉기로 돌변하기 일쑤다. 오이디푸스가 그러했고, 삼성이나 구글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천주교인들은 원죄의 개념을 믿는다. 성당에 안 나간 지 10년이 넘은 나도 원죄를 믿는다. 다만 그 뜻은 좀 다르다. 내가 이해하는 원죄란, 환경에 적응하고 강점을 가지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이런 걸 보다 보면, 성자필쇠야말로 인간사의 유일한 법칙인지도 모른다. 내 칼이 언제 나를 찌를지 그 누가 알겠는가.

그래도 난 구글이 좋아!! 그래, 난 막장 공돌이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