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완: 아나킨, 내 충성의 대상은 공화국이야. 민주주의란 말이다!

아나킨: 나와 함께하지 않겠다면, 당신은 내 적일 뿐이야!

오비완: 오직 시스만이 그렇게 극단적이지. 난 내 할 일을 하겠다. (라이트세이버를 뽑는다.)

아나킨: 해 볼 테면 해 보시지. (역시 라이트세이버를 뽑아들고 덤벼든다.)

1.

공화국은 멸망하고, 제다이는 파멸했으며,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흑화하여 다스 베이더가 되었다. 스타워즈 프리퀄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는 숙련된 화가의 손마냥, 오랫동안 윤곽선만 존재하던 스타워즈의 출발점에 아그리파 석고상보다 더 짙은 음영을 드리워 넣는다.

2.

스타워즈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광선검 결투 씬이지만, 의외로 오리지널 에피소드(4, 5, 6)에서는 그리 비중이 높지 않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 그래픽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배우들이 막대기를 들고 광선검 결투 장면을 찍은 다음 필름 위에 일일이 갖다붙여서 장면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 이런 노동 집약적 작업 방식에서는 광선검 결투 장면 자체가 오래 나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액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1 배경 이야기로만 전해져 왔던 제다이 기사들의 광선검 싸움이 은막 위로 올라가게 된 것은 세월이 흘러 기술이 발전하고, 조지 루카스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던 이야기들을 온전히 은막 위에 펼쳐내는 것이 가능해진 뒤였다. 그렇게 에피소드 1, 2, 3(aka 프리퀄 에피소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 새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화려한 광선검 액션에 원하던 장난감을 선물받은 꼬마마냥 팬들의 입이 귀에 걸린 것은 물론이다.

아나킨 스카이워커 컨셉 아트. 결국 스타워즈 전체는 다스 베이더(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이야기였다 - 프리퀄 에피소드 내내 공화국을 수호하는 제다이 기사였던 아나킨은 3편 마지막에서 흑화하여 다스 베이더가 되고, 오리지널 에피소드에서는 은하 제국에 충성하는 적으로 등장한다. (출처: cine21)

하지만 프리퀄 에피소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제다이의 길을 버리고 흑화한 아나킨과 스승 오비완의 대결이다. 프리퀄 에피소드 전체가 고전 비극을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 3의 복선이자 배경 설명으로서 차곡차곡 쌓아졌다면, 에피소드 3는 다시 아나킨의 최후와 다스 베이더의 탄생을 그린 이 장면을 올려놓기 위해 정성들여 쌓아올려진 기단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장면의 중요도는 프리퀄 에피소드의 다른 라이트세이버 결투들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아나킨과 오비완을 맡은 배우들(대역 아님)은 수개월동안 식단까지 조절해 가면서 이 장면만을 위한 연습에 매진했는데, 결국 최종 촬영 직전에는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칼을 주고받는 모습을 무리 없게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3.

저 장면에서 누구는 전 에피소드에서 가장 화려한 검술 대결을 보고, 누구는 너무 잘 맞춰진 안무 같은 부자연스러움을 보지만, 나는 오히려 그 뒤에 숨겨진 처절함과 서글픔을 본다. 단순히 화려한 결투 씬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다른 라이트세이버 결투와 비교해 보시길.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둘의 싸움이 다른 라이트세이버 결투와 다른 점은 거울상을 보는 것마냥 똑같은 사람 둘이서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오리지널 시리즈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좀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으니 제외하고 생각하자.) 많은 이들이 열광했던 요다와 두쿠 백작, 다스 시디어스의 대결 장면도 그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콰이곤, 오비완과 다스 몰의 싸움 역시 싸우는 사람 간의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공화국에 충성하는 스승과 변절하여 시스의 편이 된 제자는 이제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처지가 되었지만, 칼이 나가는 순간도 비슷하고 심지어 똑같은 순간에 거울상처럼 똑같은 기술이 나간다. 흡사 거울상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것 같은 부조리함이 이 결투 장면의 특징이다.


그럴 만도 하다. 우리는 영화에서 묘사된 모습만 생각하는데, 잘 생각해 보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지간을 넘어선다. 오비완은 콰이곤의 유지를 이어 아직 꼬마였던 아나킨을 키웠고, 그가 제다이 마스터가 될 때까지 책임지고 지도했으며, 아나킨이 제다이 마스터가 된 뒤에는 오랫동안 전쟁터에서는 함께 싸워 온 믿음직한 전우로 여기며 살아왔다. 서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이인 것이다. 아무리 제다이가 예지 능력이 있어서 웬만한 블래스터 공격은 피하거나 받아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똑같으면 흡사 둘이서 춤을 추듯이 동작이 척척 맞을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어색할 것이 하나도 없는 장면인 셈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와 함께 클론 전쟁에서 싸운 전우란다... 그는 은하계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영리한 전사이기도 했지." 에피소드 4의 회상 장면 사이사이에 프리퀄 에피소드의 내용을 삽입해 넣은 팬 영상이다.

4.

오비완이 아나킨의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장면이 조금 김빠진다는 사람도 있다. 나도 저 부분을 수백 번도 더 돌려봤기 때문에 무슨 생각에서 그러는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시 한 번 잘 보시길: 아나킨이 오비완 앞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사실 세 번 나온다. 아나킨이 처음 라이트세이버를 뽑아들고 덤벼드는 순간과 둘이 용암 위에서 결투를 벌이는 부분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오비완은 아나킨을 해치울 거라면 진작에 해치울 수 있었는데도 그 천금같은 기회를 두 번이나 포기해버리면서 마지막까지 제자에게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셈이다 - 심지어 자기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아나킨의 팔다리를 잘라버리기 직전, 오비완은 마지막으로 아나킨을 말린다: "이제 다 끝났다, 내가 고지를 선점했어! ... 제발 그러지 마라!" 이미 설득은 포기했지만, 어차피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으니까 항복하고 목숨이라도 건지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공적인 책무와 사적인 감정에 갈등하며 먼저 칼을 뽑긴 했지만, 스승은 마지막 순간까지 타락한 제자의 마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눈이 뒤집어진 아나킨 귀에 그게 들릴 리가 없었고, 결국 오비완은 다 포기한 채 아나킨을 베어버린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채 용암 앞으로 굴러떨어진 아나킨은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다.

"당신을 증오해!!" 아나킨은 눈이 샛노랗게 물들면서 시스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5.

"한때 내 제자였고 역시 제다이였던 다스 베이더가 악의 길에 들어서서 제다이를 몰살했단다. 네 아버지도 그 때 살해당했지."

스타워즈의 출발점이 된 에피소드 4 초반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된 오비완은 아버지에 대해 듣지 못한 채 시골에 숨어서 자라던 아나킨의 아들 루크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아나킨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그렇게 제다이 기사단은 멸망했어... 베이더는 포스의 어두운 면에 유혹당한 것이란다."

거울상의 싸움

오비완은 용암의 복사열에 온 몸이 불타기 시작한 아나킨을 남겨둔 채 아나킨의 라이트세이버만을 챙겨서 떠나버린다. 이 라이트세이버는 훗날 아들인 루크에게 전해진다.

아마 그 순간 오비완의 뇌리를 스친 것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제자를 베어 넘겨야만 했던 순간의 처절함과 서글픔, 비통함과 고뇌였을 것이다. 이 정도면 스타워즈의 출발점을 묘사하는 장면으로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1. CG로 떡칠된 요즘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도 오리지널 에피소드에서 밀레니엄 팰콘이 한쪽만 나온다는 것은 이미 유명하다 - 모형을 만들어 놓고 찍어야 하는데 예산이 없어서 한쪽만 만들었기 때문. 전 가이낙스 사장인 오카다 토시오에 따르면, 이런 이유 때문에 설원에서의 전투 장면으로 유명한 에피소드 5가 업계인들에게는 오히려 더 충격이었다고 한다. 좋든 싫든 필름을 이어붙이면 붙인 자국이 남기 마련인데, 에피소드 5에서는 새하얀 설원을 묘사하면서도 그런 게 하나도 안 보였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