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노인
1.
"고문은 개인적 폭력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다. 고문은 정권의 야만성과 국민의 용기가 어떤 눈금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다. 고문은 국민과 정부의 역학관계가 뒤바뀌지 않을 때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뭐든 그 수효가 늘어나면 그에 딸려 이상한 것의 수도 늘어나는 법이다.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한길사, 1987)은 책 읽기를 즐겨하는 내게 있어 그 '이상한 것',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책에 속한다. "고문은 정권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구조적 폭력"이라 규정하는 이 책은 조선총독부에 소속된 조선인 경찰간부들의 해방후 행적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 '고문 인맥'에 대해 추적함으로써 해방 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경찰의 고문 관습의 뿌리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건들이 고문을 거쳐 '만들어져 왔는지'를 폭로한다.
언뜻 보면 이 책은 뭐 하나 이상할 것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부제에 적힌 저자 이름을 보게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기자 J의 현대사 추적 2탄, 고문에 의한 인간파멸과정의 실증적 연구" 동명이인 아니냐고? 전혀. 이 책의 저자는 당신도 알고 있을 바로 그 J씨가 맞다. 소위 "말이 안 통하는 꼴통 늙은이"의 대명사, "자기하고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는 망령 든 늙은이", J씨 말이다.
2.
어떻게 보면, 이 정도 변절은 한갖 농담거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 중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변절자가 있었다: 사도 바울.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사도라고 불리지만,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속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배운 정통 바리사이파 랍비1였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살기 등등하게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고 다녔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기 위해 이곳저곳을 이잡듯 뒤지고 다니며 신도들을 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지 대사제에게 가서 편지를 써달라고까지 했다. 허가만 내준다면, 다른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도 몽땅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고 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소스라치게 놀라 땅에 엎어진 사울은2 곧 다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여 먹고 마시지도 못했다. 이윽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다시 보게 된 그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뒤, 여러 회당으로 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전의 삶을 미련없이 버리고 회심한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다. 그리고 여생을 지중해 세계 이곳저곳에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바쳤다.
3.
바울은 왜 변심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왜 그리도 열정적으로 그리스도 교인들을 박해하러 다녔을까? 아무도 모른다.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거기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초기 교회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그에 대해서도 거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 전해지는 것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짧은 기록과 그가 신약성서에 남긴 몇 권의 소책자가 전부3이다.
이쯤에서 처음 이야기한 기자 J씨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요즘 내 또래 젊은 층들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는 옛날부터 전설적인 취재력을 보유한 기자로 유명했다.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탐사취재의 독보적인 달인으로, 수많은 비리와 용공 조작 사건들의 진실을 밝혀낸 사람이 그다. 신군부가 보낸 진압군이 피의 휴가를 보내고 있던 1980년의 광주에 휴가를 내고 개인적으로 침투, 목숨을 걸고 취재를 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런 눈엣가시를 군사정권이 가만 둘 리 없었다. 그는 웬만한 사람은 한 번 가는 것도 두려워했던 중앙정보부(안기부)를 세 번이나 끌려갔다 나왔다. 하지만 주류 사회의 비리와 치부를 매섭도록 비판하고 다니던 그는 중앙 언론사의 월간지로 자리를 옮기고 승진을 계속하기 시작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군사독재를 옹호하고, 자신과 함께하던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빨갱이라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것이 그의 이미지가 됐다. 아무도 그의 예전 모습을 선뜻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게 회심해버린 것이다.
그는 왜 변심했을까? 어떻게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이 가능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오래된 언론인들조차도 거기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변신한 이유를 그의 출신에서 찾곤 한다. 지금은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20년 전만 해도 기자, 특히 중앙 일간지 기자는 소위 기자고시를 통과한 명문대 출신들이 점령한 직종이었다. 철저히 주류의, 주류에 의한, 주류를 위한 영역이었던 것이다. J씨는 아니었다. 그는 이름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미한 지방 대학 출신이다. 소위 '기자고시' 를 통과한 중앙 일간지 기자 출신도 아니다. 그가 기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곳은 지방 일간지였다. 그러니까 그의 변심은 비주류로서 주류 사회에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며 자기 자신을 수정한 결과라는 것이다. 비주류의 출신 성분을 가진 그로서는 원래 주류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주류스럽게 행동하는 게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4이다.
4.
사실, 이런 류의 인물상은 주류 사회의 차별이 극심한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이 별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아마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끔찍하게 괴롭히는 이스라엘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경 중에서도 유난히 표독스러운 이들이 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흑인 유태인들이다. 단일 민족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주류는 엄연히 유럽 등지에서 살다가 귀환한 백인 유태인들이고, 나머지 유태인들은 사회 이곳저곳에서 차별을 받는다. 피부색이 검은 이들에게는 더하5다.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는다는 점에서만 보면 이들은 인간 취급을 못 받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나 아랍계 이스라엘 인들하고 별로 다르지도 않다. 그런데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차별하는 백인 유태인들보다 훨씬 더 잔혹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그럴 것 없다. 주류 집단과 아주 작은 차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와 필요가 있고, 주류보다도 더 비주류를 증오하고 학대하는 것은 그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출신과 정체성에 의거한 차별은 개인적 폭력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다. 이는 그 사회의 야만성과 구성원들의 상식이 어떤 눈금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다. 이 시스템은 출신과 정체성을 근거로 증오와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제가 뒤집어지지 않을 때까지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젊었을 적 빼어난 취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학벌과 출신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 기자가 비슷한 이유로 배제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빨갱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노인이 되는 건 아주 소소한 예일 뿐이다.
이런 사회 또한 동서고금을 통해 여럿 있었기 때문에, 별로 이상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기원 전후의 유대인들은 유대적 전통 세계와 그리스·로마 문화를 포함한 이방인적 세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혈통과 문화에 대한 순수성을 강조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순수성을 더럽히는 어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차별과 탄압의 대상이 된다. 많은 이들이 바울의 출신 성분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틀림없이 예루살렘의 이름난 율법학자 아래에서 수학한 그는 여러 모로 당대 주류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단 하나의 작은 차이를 빼면 말이다 - 그는 해외의 유대인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다. 당대 주류 사회에서 배척될 수밖에 없던 이방 문화가 바로 그의 출신 성분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변절자는 결코 특이한 캐릭터가 아니라 보편적인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다. 한미한 출신의 주류 언론사 기자나 검은 피부의 이스라엘군 병사하고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얘기다.
5.
2천년 전, 중동의 광야에 유대교의 소수 종파가 살았다.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오래지 않아 올 종말을 믿었던 그들은 사막에 숨어 집단 생활을 하며 이제 곧 강림할 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들의 교조는 티베리아스 황제 치세 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라 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며 어떠한 가르침을 내렸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2천년이 지난 지금, 그 종파는 더이상 소수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민망해질 정도로 거대해졌다. 더이상 유대교의 일부로 취급되지도 않으며 최대 종파인 천주교를 믿는 인구만 해도 전세계 인구의 20%에 이른다. 이 작은 종파가 세계인의 종교가 되는 데에는 어려서부터 차이와 차별에 익숙했던 어느 위대한 변절자의 공이 컸다. '구약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적 율법을 기계적으로 준수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던 그의 주장은 이 작은 종파가 이방인들을 위한 종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솔직히 나로서는, 그가 어떤 이유 때문에 회심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 노기자가 변심한 이유도 모르는데 2천년 전에 살던 사람의 머릿속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웬만해선 그저 맞추고 적응하기에 바쁠 강고한 장벽을 스스로 허문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존경받는 이유 또한 수긍이 간다. 아마도 2천년 전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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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초기 교회가 발흥하던 1세기 무렵,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의 여러 종파들 중 하나로 이해되었다. 당시 유대교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일파였던 사두가이파, 사두가이파의 타락을 비판하고 율법 연구에 관심을 갖던 바리사이파, 로마에 대한 무력 투쟁을 주장하던 젤롯파, 사막에 나가 율법을 지키며 종말을 기다리던 엣세네 파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독립하고 유대교가 바리사이파를 중심으로 일원화된 것은 유대의 대반란(AD 67~AD 73), 특히 예루살렘 함락(AD 70) 이후의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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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다마스쿠스에는 현재 이 모습을 묘사한 조각이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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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27권 중 바울이 집필한 것은 모두 13권으로 전하며, 그 중 현대의 학자들이 실제 바울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음 7권이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재·둘째 서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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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런 설명이 어느 정도의 설득력은 가질지는 몰라도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미 그는 변심하기 전부터 '비록 군사독재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그 공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는 것. 자세한 것은 2006년 8월 신동아 기사를 참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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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들이 헌혈한 피를 이스라엘 정부가 몰래 폐기한 게 밝혀져 큰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을 정도. ↩
–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니면서 거의 베드로 사도에 버금가는 지위랄까 인지도를 얻은 건 역시 당시 이스라엘 이외의 외부 사회로 전파한 공 덕분이겠죠. (전 이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은 선하신 교황 요한입니다. 그분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지 않았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20세기에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 지금은 아무리 수구꼴통의 대명사로 불리는 조갑제 기자이기는 하지만, 낚시 기사라거나 영양가 없는 기사들을 올리는 작금의 기자들이 그의 과거의 활약이랄까 열정을 반이라도 배웠으면 좋겠달까요.
그런 이유(2차 공의회)때문인지, 요즘 쌀나라에선 오히려 카톨릭이 개신교보다 훨씬 “쿨”하게 – 특히 10,20대들에게 – 받아들여진다고 하더군요. 신앙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힐링 –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로 비치는 알록달록한 빛들, 낮지만 묵직하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 같은 그 “성스러운 느낌”이 “쿨함”으로 자리잡아 간다더라구요. 저처럼 기독교인도 비기독교인도 아닌 좀비같은 존재에겐, 오히려 이쪽이 훨씬 와닿긴 합니다. (기독교리에 따르면) 신앙은 아무나 갖고싶다고 가질수 없는 일종의 “신의 선물”같은 것이지만, 성스러운 느낌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느낌이니까요. 이런 추세라면 카톨릭 버전의 eat pray love 류의 영화가 곧 나올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어쩌면.
아인하르트 // 예, 저는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에게 ‘예수를 신으로 만든 사나이’ 라는 표현이 그리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없었다면 아마 기독교는 유대교의 소수 종파에서 바로 끝났을 거에요.
헐킝 // 오, 그거 참 신기한 일이로군요. 전통적으로 미국이 청교도 국가였다는 걸 생각하면요.
서로 다른 방향의 변절을 엮어서 쓰신 글이 일품이군요. 엮으시는 솜씨가 아주..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울(바울)의 경우에는 말씀하신것처럼 매우 독특한 이력이 여러가지 있었죠. 쓰신것처럼, 그는 당대의 매우 존경받는 랍비 중 하나였던 가므니엘의 문하생이었던 동시에 매우 젊은 나이에 70인 공회에도 속했던 초엘리트 였으니까요.
구지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S대학사 + 왕존경받으시는 교수님의 수제자로 석박통합과정? 정도로 보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는 (언급하신것처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죠. 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처럼, 사울(바울)은 진정한 주류사회 편입을 위해 오히려 훨씬 예수를 핍박했다고 “추측”할수 있겠죠. 기독교가 신천지를 핍박하듯이, 빨갱이를 잡아 죽이듯이, 친일파를 죽이(지 못했듯)이, 나치잔당을 소탕하듯이 – 와 같은 맥락이겠죠. 그래서 스테반 선지자를 직접 나서서 대낮에 길거리에서 돌로 쳐 죽여버리는 일도 진두지휘했겠구요.
제가 한 가지 이해가 안가는것은 “그가 어떤 이유때문에 회심했는지 알 길이 없다”는 문장입니다.
1 신의 존재를 – 유일신인 야훼를 – 인정하는 입장이라면 :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소위 “기적”(직접간섭) 때문일텐데, 아마 이 카테고리에 속하실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되지만 적어도 그가 회심한 이유는 명백하고,
2 신(야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성경을 역사책으로는 인정하는 입장이시라면:
그것은 지금도 지하철역 앞에서 열심히 전도하시는 수많은 증거분들 처럼,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변화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왜 종교를 믿는가에 대한 수많은 논문이 그 근거겠죠.
제 추측엔 아마 고어쿤님의 말씀은 “그 종교적 신념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경험적으로는 이해할수 없다”가 아닐까 싶네요.
-그 “종교적 신념”이란것이 “있다”는것은 “알고”있지만
– 또한 그런 신념때문에 특정 가치에 대해 엄청나게 보수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알지만
– 그런 신념자체가 “왜” 머리통속에서 생성되는지 그 이유와 프로세스를 “전혀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은데 제가 맞게 해석한건지는 모르겠군요. 사실 그 부분은 저도 마찬가지라.. 저역시도 궁금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래서 신앙을 선물이라고 표현한다죠. 뭐 전 받아본적이 없는 선물이라)
어쨌든 두 케이스 모두 그가 회심한 이유는 꽤 클리어하지 않나 싶습니다.
1. 신의 간섭이거나,
2. 종교적 심경변화 거나,
3. 미쳤거나.
이해할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건 아니니까요. 다만 뇌속에서 일어나는것이니 증명하기가 힘들뿐이겠죠.
그런데 리플을 달다보니 저도 궁금한 것은,
그가 정말 단순히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받기위해서”만”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예수쟁이들을 핍박했을까? – 그것이 정말 그가 그렇게까지 강도높은 핍박을 했던 정말 주된 동기였을까?하는 의문입니다. 제 생각엔 사울(바울)도 고어쿤님처럼, “원래 그냥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타입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거든요. 글에 따르면 그는 단순히 그가 주류사회에 편입되기위한 욕망에 불타는 – 이를테면 욕망의 불덩이 – 였다면, 개종 후에는 오히려 덜 열정적인 삶을 살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회심 전의 행동에 대한 마음의 빚, 그에따른 트라우마 때문에 개종 후에도 그렇게 열심히 전파하고 다녔다면.. 이 경우에는 욕망의 불덩어리론도 긍정되긴 하겠네요. 흠.
제가 생각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과연 자신이 배워 온 율법에 맞는 일인가를 진지하게 회의하다가, 결국 완전히 변심해서 기독교로 넘어왔다는 쪽입니다. 고민을 해서 내린 결론인 만큼 그 뒤에 열심히 전도를 하고 다닌 것이겠죠.
비주류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주류사회로 편입하기 힘든 것 같네요. 옛날 골품제가 있었던 신라시대에 당나라에서도 인정받았던 최치원은 6두품이라 결국 인정도 못받았죠. 미국에서도 흑인이 성공할려면 백인보다 더 백인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예전 국무장관 했던 콜린 파웰도 그렇구요. 오바마도 콜럼비아 –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완전 엘리트 출신이죠.
그런데 고어핀드님은 글을 너무 잘쓰시는것 같아요~^^
어헛,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J기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제가 들은 버전은- 좌우측의 성향이 있다기 보다는 고전적인 자유론자에 가깝고, 초기의 고문에 대한 탐사보도 역시 그런 측면에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만 조선일보는 이러한 삐딱한 아저씨를 지방일간지에서 발탁할 능력- 약간 표현이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와 같은 이방인을 기용해서 중책을 맡길 수 있는 조직의 상태를 능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을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학별 위주의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진보 라인은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고전적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북한쪽의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과 비인권적인 체제에 대한 증오 역시 과거의 활동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말이 안통하는 골통 늙은이라는 이미지는 J기자의 스타일상 피할 수 없는 평가일지도 – 그런 골통기질이 기자로서의 업적을 받쳐주는 힘일테니까요. 다만 뭔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나는 지옥에 갔다 돌아왔는데, 여기서 편하게 뒷담화하는 니들이 뭘 알겠니라는 듯한 인상을 주는 면이 있습니다(슬쩍 한번 본 것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인상이 강렬해서).
예, 저도 그런 시각에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 분이 나이가 드시면서 짜증이 느셨는지 간간이 폭주를 해 주셨는데, 후대 사람들 눈에는 그게 지나치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게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