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겐, 한자 동맹의 도시
2005년 8월 17일 오전 10시
노르웨이 - 베르겐
오전 8시. 우리는 베르겐에 도착했다.
베르겐Bergen. "산의 목장"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도시는 1070년에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힛레Olav Kyrre에 의해 건설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이 지역에는 이미 1020년대부터 작은 교역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역은 단순한 호구지책이라기보다, 도시 탄생의 순간부터 그 존재를 함께 해 온 베르겐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베르겐은 중세의 중요한 교역 도시로서 12~13세기에는 노르웨이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현재도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항만도시이다. 그리고 중세 베르겐의 번영 뒤에는 있었던 것이 북유럽 교역 도시들의 동맹이었던 한자 동맹이다.
청어와 상인들
우리에게 생선이란 그저 먹을거리의 한 가지에 불과하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육류가 대량 사육/도축 시스템이 갖춰진 현대에 비해, 중세시대에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기는 아주 힘들었다. 그나마 겨울 같은 때만 되면 먹일 건초가 모자라 가축들이 비쩍 마르곤 했기 때문에, 고기는 정말 귀한 음식이었다. 향료에 절인 쇠고기 같은 비싼 음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난한 평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잘 해야 햄, 소시지나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정도였다.
그나마 이것도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세 유럽은 어디건 할 것 없이 천주교를 믿었는데, 덕분에 육류를 먹을 수 없는 종교적인 단식일이 많았고 또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말린 생선이나 소금에 절인 생선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식량이었다. 비교적 가격도 싸고, 오랫동안 상하지 않아 부담없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1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과적으로 세계 무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2~13세기부터 발트 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카니아Scania 어업이라 불리는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스웨덴 남서쪽의 스카니아 반도에서 유래했는데, 북해에서 잡힌 청어2와 대구 등의 어류가 여기서 거래되었던 것이다. 1년 내내 한적한 이 지역의 시골 마을들은 매년 7월 25일부터 9월 29일까지 두 달 동안은 유럽에서 가장 바쁘고 활기찬 장터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해상 교역 산업도 덩달아 발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청어를 염장하거나 대구를 말리는 데 필요한 소금 뿐만 아니라, 내장을 빼내고 염장 작업을 수행하는 일꾼들이 먹을 식량이나 맥주 등도 보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리가 끝난 생선을 유럽 시장에 내다 파는 것도 수지 맞는 장사였다.
상업 도시들의 동맹
중세에는 지금과 달리 제대로 틀이 잡힌 해운법이 없었다. 무력을 갖춘 누군가가 교역품을 강탈해 가는 일도 흔했기 때문에 해적과 상인이 그리 구분되지도 않았다. 상인들은 스스로 무장을 갖추고 단결함으로써 서로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했다. 청어 거래가 활발해진 북유럽에서 교역 도시들간의 동맹인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 Hanseatics)이 등장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이 동맹은 비밀 조약의 점진적인 확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13세기 중엽에는 잘 조직된 모습을 보여 주며, 1370년 덴마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체력한 슈트랄준트 조약Treaty of Stralsund은 이 시기 한자 동맹이 당당한 강대국의 일원3이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자 동맹이 취급하는 상품들은 많았다. 생선은 물론이고 서쪽으로는 잉글랜드의 양모부터 플랑드르의 모직물,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가죽, 밀랍, 꿀 등 모든 것이 그들의 매매 대상이었다.4 플랑드르의 모직물이나 러시아의 가죽은 부유층의 사치품이었고, 꿀은 중세까지 설탕 대용으로 많이 쓰였다. 밀납 역시 당시의 필수품이었던 양초를 만드는 재료였다는 걸 생각하면, 당시 생필품의 상당 부분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었다.
앞서 밝혔지만, 당시의 바다는 해적 행위가 횡행했고 봉건 영주들이 함부로 상인들의 재산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큰 상업 거래 자체가 일어날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거대한 상업 거래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한자 동맹이 보유한 해군력과 정치적 영향력 덕분이었다. 한자 동맹은 생필품 뿐만 아니라 배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의 공급까지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돛을 만드는 아마나 스웨덴산 철, 러시아산 목재 등의 공급이 한자 동맹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봉건 왕국이나 영주들은 한자 동맹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동맹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영향력 확보에 나서기도 했다. 예를 들어 1471년 전쟁에서 승리한 요크 집안의 에드워드가 잉들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자, 그에게 전쟁 자금을 대 준 한자 동맹은 잉글랜드의 양모 수출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자 동맹은 발트 해에서 잉글랜드에 이르는 북해의 상업을 거의 독점했다.이들은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서 외국인이 새 배를 사거나 선장으로 취직하는 일, 상품을 선적하는 것을 금지하여 독점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
한자 동맹의 황혼
중세의 산물이었던 한자 동맹은 근세식 절대 왕정 국가가 등장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자 동맹이 고집하던 교역권 독점이라는 방식은 중세에는 막대한 상업 거래를 가능케 했지만, 국왕이 권력을 장악한 절대 왕정 국가에서 이런 것을 허용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597년의 런던 상관Steelyard이 폐쇄된 한자 동맹은 1669년의 한자 회의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동맹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였던 베르겐은 각국의 공예품을 취급하고 선박업 등에도 손을 대 계속 그 번영을 이어나갔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베르겐은 북유럽 최대의 항만 도시였다.
참고문헌
C. Ernest Fayle, 『A Short History of the world's shipping industry』, Routledge (김성준 역, 『서양 해운사』, 혜안,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