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왜 ‘용병’ 인가? #1

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郎, 제 3권 중에서.

돈 받고 싸우는 용병이란 존재는 중세를 모티프로 한 판타지물 등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요즘 세대에게는 꽤나 친숙한 소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들에게는 꽤 생소한 제도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군대를 돈으로 산다는 것은 낯선 일1이었거든요.

국왕이 동원한 군대가 주류를 이룬 동아시아 사회와는 달리, 중세 유럽에서는 이런 폭력 서비스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 사회체제의 특징에서 비롯됩니다.

봉건식 전쟁 방식

중세(the middle age)라는 시기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봉건 제도(feudal system)를 근간으로 하는 시대입니다.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기사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지만, 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9~10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이 와해되면서 유럽 전토는 다시 한 번 난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왕국 곳곳에서는 내전이 계속되었으며 외부의 침략자들2은 끊임없이 유럽을 괴롭혔습니다. 백성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기사의 보호가 필요한 반면, 기사들은 비싼 말과 무구(武具)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http://www.flickr.com/photos/pshab/2445349644/

이러한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백성들은 기사에게 땅을 바치고 그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더 큰 군대의 지원이 필요했던 기사들과 더 많은 기사들이 필요했던 영주들 또한 같은 식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영주도, 대영주도, 국왕도 마찬가지로 서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봉건 제도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봉건 제도란 전쟁을 위한 비용을 사회 전체가 분담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 제도의 군사적 한계

하지만 이러한 봉건적 군사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수비에 최적화된 시스템인 만큼, 반대로 공격이 힘들다는 것이죠.

봉신이 군주에게 지는 군사적 의무에는 성채에서 수비대로 복무할 것, 주군이 공격당했을 때 전쟁에 참여할 것, 각종 부조에 참여할 것, 원정에 동행할 것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봉신이 자기 비용으로 종군하는 기간은 40일3에 불과한 데다가 어디어디까지만 참전한다는 류의 계약 조건이 세세하게 붙어 있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원정이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지요.

봉건 제도의 군사적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는 바로 노르망디 공국입니다. 1066년 1월 잉글랜드의 국왕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한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이미 왕위를 물려받은 해롤드 2세와 다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1066년 9월, 기욤이 이끄는 군대는 잉글랜드에 상륙, 해롤드와 전면전에 들어갑니다.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훗날의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 http://en.wikipedia.org/wiki/File:William_the_Conqueror_invades_England.jpg

하지만 실제로 기욤이 동원한 군대는 봉건적 의무로 동원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봉신들 중에 노르망디 공국 밖으로 출격할 의무를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기욤은 주군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이나 전리품·포상 약속 등을 미끼로 군대를 모았고, 덕분에 군대의 거의 절반은 용병이거나 세력이 없어 가난한 기사들이었습니다. 봉건 시스템으로 공격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병역의 금납화

이러한 현실에 대한 가장 쉬운 해결책은, 봉신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불하고 의무 기간 이상의 군복무를 시키는 것입니다. 봉신들 또한 돈이 필요했던 만큼, 이렇게 “아르바이트” 를 뛰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자기 직속 군주뿐만 아니라 다른 군주와도 계약을 맺어서 돈을 벌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기사들 입장에서는 의무 소집은 이런저런 군주들에게 고용되어 돈벌이를 하는데 귀찮은 일이 되어갔습니다.

http://www.flickr.com/photos/54013486@N00/2716496757/

돈이 필요했던 봉신들과 상비군이 필요했던 군주들의 사정은 군역세(scutage)의 등장으로 이어집니다. 봉신들은 군복무를 돈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군주는 그 돈으로 다시 기사들을 고용해서 군대를 구성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3세기 초, 잉글랜드 전국의 기사 5천 명 중 80%가 돈으로 병역을 대신했습니다. 심지어 현존하는 Edward 1세(1239 ~ 1307) 시대의 기록은 기사·영주 대부분이 병역을 수행한 적이 없음을 시사합니다. 자신들의 의무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을 거북스러워한 일부 영주들 덕분에 봉건적 군사 체계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제 전쟁은 돈으로 고용한 군대로 치르는 것이 오히려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세 유럽에서 전쟁 서비스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용병 시스템의 본격적인 등장은 14세기 이후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부터입니다.


  1. 용병이 직업 군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시장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직업 군인도 급료를 받습니다만, 군주 혹은 국가의 통제를 받습니다. 하지만 용병은 그런 제약이 전혀 없습니다. 계약에 따라 고용주를 맘대로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2. 북유럽의 바이킹, 헝가리의 마자르족,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 등. 

  3. 파종기와 추수기 사이의 여름. 

17 thoughts on “중세: 왜 ‘용병’ 인가? #1

  1. 1. 하악 한자콕!

    2. 도시의 잉여인간+무기+푼돈+약탈 허가서=용병 (어때요, 참 쉽죠?)

    스위스 용병이라던가, 란즈크네츠라던가 하는 전문 용병 집단은 제외지만 말이죠. 참고로 해군은 죄다 용병. 사략해적=해군 함대였으니까요.

    3. 용병을 전문으로 파견해주는 회사까지 있었다는게 사실인가요?

    • 1. 하하, 대항해시대를 하면서 슈파이어 상회를 두들겨 패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기억하더군요. 레고로도 하나 나와 있습니다.

      2. 중세 말기의 용병들을 보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스위스 용병처럼 아예 국가적으로 돈벌이에 나서는 경우가 아니면 대략 비슷합니다. 란츠크네히트도 출발은 거의 잉여인간 떼거리입니다.

      3. 스위스 각 주의 정부들은 용병 파견으로 돈을 벌었고, 그 외에는 용병 대장이 일종의 기업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도 국가가 직접 용병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단계가 되면 사라지지만요.

    • 그런데, 용병들도 사병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 간부나 이 정도가 되면 다 멀쩡하게 좋은 집안 자식들입니다. 다만 영지를 상속받거나 할 처지가 안 되서 용병 비즈니스에 뛰어든 것 뿐이죠.

  2.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정부의 어떤 모습은 사실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점. 얼어죽을 웬 노블리스 오블리줴?

    • 하, 실제로 그렇군요. 그렇다면 잃어버린 천년이 되는 겁니까.

    • 거기다 돈으로 땜빵하는게 아니고 지들이 돈을 받죠 :)

    • 중세의 영주들은 농민들이 맷돌 등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자기 소유의 방앗간 등을 쓰게 강요함으로써 농민들을 수탈하기도 했다고 하니 과연 공통점이 보이는군요;

  3. 재밌군요.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돈에 따라 움직이는 용병이라면

    계약한 고용주가 있는 상태에서, 그 고용주와 적대적인 다른 미래의 고용주에게 더 많은 돈을 약속받고 배신해서 찔러 죽이는 용병의 사례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용병 시스템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서 제가 들어 본 사례 중에는 그런 사례가 없습니다. 고용주도 충성심이 강한 근위 병력과 경호대를 운영하는데다 그 바닥도 일종의 직업 윤리 비슷한 게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배신한 전력이 있는 용병은 아무도 고용하려 하지 않겠죠?)

      하지만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면서 돈을 뜯어내거나 하는 짓은 일상적이었다고 하네요.

    • 단순하게 생각해본 거지만…

      돈을 나중에 받기로 약속하는 것은, 진짜로 돈을 줄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용병 입장에서는 꺼리게 되고,

      반대로 돈을 선불로 받는 것은, 돈만 받고 입 닦아버릴 우려에 상대 고용주 쪽에서 꺼릴 것 같습니다.

      이게 떳떳한 계약이면 사기(?)당한 쪽에서 왕이나 교회에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겠고, 또 그 때문에 사기를 차마 칠 수 없게 방지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떳떳은 커녕 그 반대의 상황이니…

    • 용병의 양상도 시기에 따라 다양합니다만 용병 대장이 기업 노릇을 하던 시기의 계약 방식에 대해 말하자면, 선금도 있고 일 끝나고 받는 돈도 있고 특별수당도 있고 해서 나눠서 받는 식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계약 종료가 다가오면 용병 대장들은 행동이 굼떠지기 마련이었다고 하네요.

  4. 봉건제도의 성립을 프랑크 왕국이 바이킹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지방에 요새를 축조하는것을 허락하고 나서부터라고 한다면, 농민이 기사의 보호를 바라고 그들에게 예속되었다는 설명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프랑크 왕국에는 이미 8세기부터 기병 계급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이 지방 사회의 지배자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요.

    • 기사 계급이 탄생한 것은 말씀하신 대로 8세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 때는 봉건적 제도는 아직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지요. 초기의 기사들 또한 세금을 받아서 생활했습나다만, 그건 기사 노릇을 하는 대가로 자유민들에게서 세금을 받을 권리를 받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유 농민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봉건제와는 이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점이 나는 거죠.

      그러니까 기사와 봉건제도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긴 합니다만, 둘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게 결론 되겠습니다. 실제로는 약간의 시차를 가지고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5. 동양에도 용병 개념은 있지 않았나요 ? 우리네에게는 좀 생소하긴 하다만

    일본도 중국도 용병들을 자주 써먹었다 하더라구요. 당장 임진왜란만 하더라도

    일본의 철포 용병대나 명나라의 몽골 용병들이 참전하기도 했고..

    뭐 그게 서양식의 금전을 통한 계약관계는 아니겠지만..

    • 동양의 경우 용병 시스템 자체가 주류가 되지도 못했을 뿐더러 고용 방식 또한 단순한 금전 관계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양하고 양상이 많이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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