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郎, 제 3권 중에서.

돈 받고 싸우는 용병이란 존재는 중세를 모티프로 한 판타지물 등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요즘 세대에게는 꽤나 친숙한 소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인들에게는 꽤 생소한 제도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군대를 돈으로 산다는 것은 낯선 일1이었거든요.

국왕이 동원한 군대가 주류를 이룬 동아시아 사회와는 달리, 중세 유럽에서는 이런 폭력 서비스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 사회체제의 특징에서 비롯됩니다.

봉건식 전쟁 방식

중세(the middle age)라는 시기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봉건 제도(feudal system)를 근간으로 하는 시대입니다.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기사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지만, 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9~10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이 와해되면서 유럽 전토는 다시 한 번 난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왕국 곳곳에서는 내전이 계속되었으며 외부의 침략자들2은 끊임없이 유럽을 괴롭혔습니다. 백성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기사의 보호가 필요한 반면, 기사들은 비싼 말과 무구(武具)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medieval helments

이러한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백성들은 기사에게 땅을 바치고 그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더 큰 군대의 지원이 필요했던 기사들과 더 많은 기사들이 필요했던 영주들 또한 같은 식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영주도, 대영주도, 국왕도 마찬가지로 서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봉건 제도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봉건 제도란 전쟁을 위한 비용을 사회 전체가 분담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건 제도의 군사적 한계

하지만 이러한 봉건적 군사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수비에 최적화된 시스템인 만큼, 반대로 공격이 힘들다는 것이죠.

봉신이 군주에게 지는 군사적 의무에는 성채에서 수비대로 복무할 것, 주군이 공격당했을 때 전쟁에 참여할 것, 각종 부조에 참여할 것, 원정에 동행할 것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봉신이 자기 비용으로 종군하는 기간은 40일3에 불과한 데다가 어디어디까지만 참전한다는 류의 계약 조건이 세세하게 붙어 있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원정이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지요.

봉건 제도의 군사적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는 바로 노르망디 공국입니다. 1066년 1월 잉글랜드의 국왕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한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이미 왕위를 물려받은 해롤드 2세와 다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1066년 9월, 기욤이 이끄는 군대는 잉글랜드에 상륙, 해롤드와 전면전에 들어갑니다.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훗날의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 http://en.wikipedia.org/wiki/File:William_the_Conqueror_invades_England.jpg

하지만 실제로 기욤이 동원한 군대는 봉건적 의무로 동원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봉신들 중에 노르망디 공국 밖으로 출격할 의무를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기욤은 주군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이나 전리품·포상 약속 등을 미끼로 군대를 모았고, 덕분에 군대의 거의 절반은 용병이거나 세력이 없어 가난한 기사들이었습니다. 봉건 시스템으로 공격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병역의 금납화

이러한 현실에 대한 가장 쉬운 해결책은, 봉신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불하고 의무 기간 이상의 군복무를 시키는 것입니다. 봉신들 또한 돈이 필요했던 만큼, 이렇게 "아르바이트" 를 뛰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자기 직속 군주뿐만 아니라 다른 군주와도 계약을 맺어서 돈을 벌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기사들 입장에서는 의무 소집은 이런저런 군주들에게 고용되어 돈벌이를 하는데 귀찮은 일이 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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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필요했던 봉신들과 상비군이 필요했던 군주들의 사정은 군역세(scutage)의 등장으로 이어집니다. 봉신들은 군복무를 돈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군주는 그 돈으로 다시 기사들을 고용해서 군대를 구성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3세기 초, 잉글랜드 전국의 기사 5천 명 중 80%가 돈으로 병역을 대신했습니다. 심지어 현존하는 Edward 1세(1239 ~ 1307) 시대의 기록은 기사·영주 대부분이 병역을 수행한 적이 없음을 시사합니다. 자신들의 의무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을 거북스러워한 일부 영주들 덕분에 봉건적 군사 체계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제 전쟁은 돈으로 고용한 군대로 치르는 것이 오히려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세 유럽에서 전쟁 서비스를 돈으로 사고파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용병 시스템의 본격적인 등장은 14세기 이후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부터입니다.


  1. 용병이 직업 군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시장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직업 군인도 급료를 받습니다만, 군주 혹은 국가의 통제를 받습니다. 하지만 용병은 그런 제약이 전혀 없습니다. 계약에 따라 고용주를 맘대로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2. 북유럽의 바이킹, 헝가리의 마자르족,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 등. 

  3. 파종기와 추수기 사이의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