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갑옷의 조건들
전쟁에 쓰이는 갑옷(혹은 군복)이란 실용성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통일된 복색이나 강해 보이는 디자인 - 속칭 뽀대 - 으로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이다.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통일된 문양으로 맹수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는 얼룩말이나, 화려함을 뽐내면서 싸우는 수컷 짐승들과 비슷하다.
따라서 갑옷이란 물건은 남성미의 총집합체로 봐도 상관없다. 수천 년에 이르는 동안 전쟁 무기와 군사 제도는 셀 수도 없이 바뀌어 왔지만, 기본적으로 군복이란 남성미를 극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략의 경향은 있었다.
1. 키는 일단 큰 것이 좋다.
자연관계에 대한 인간의 애니미즘적/토테미즘적 시각은 본질적으로 "큰 것" = "강한 것"이라는 공식을 세워놓고 있기 때문에, 키가 커 보이는 것이 더 강해보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많은 문명권들은 갑옷 착용자의 키가 커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가장 흔한 방법은 투구에 장식물을 붙여서 덩치가 크게 보이는 것이다. 물론 개나 소나 다 하는 것도 아니고 계급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화려한 장식물을 붙이는 것이 허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뿔은 맹수를 연상시키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자주 애용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머리로 들이받는 등의 실제적인 효용은 없지만.
뿔을 깃털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키가 커 보이게 하기 위해 유명한 영국 근위대의 털모자 등이 등장했다.
2. 짙은색이나 강렬한 색이 좋다.
갑옷에서 가장 애용되는 색깔은 검은색이나 그에 가까운 아주 짙은색이다. 검은 색 제복은 군복 말고도 신부의 복장이나 영국 경찰의 제복, 나치 친위대(알게마이네 SS:Allgemeine SS)의 제복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용도가 무엇이든 대략 권력을 상징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신부복의 경우 재질이 차분한 느낌을 주는 반면 SS의 제복은 단정하면서도 굉장히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러한 차이점이 두 복장 사이에 극대 극의 인상을 남긴다. 비슷한 물건으로 흑기사를 컨셉으로 한 독일군 전차병 군복이나, 일반적인 수병과는 인상이 사뭇 다른 소련 해군 육전대의 군복도 있다.
강렬하고 눈에 잘 띄는 색상인 빨간색도 많이 쓰인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빨간 갑옷을 상당히 애용하여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데, 빨간 갑옷을 장비한 삼천 병력을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진지로 돌격한 사나다 유키무라는 특히 유명하다. 근대 영국군의 복장이나 프랑스 군의 바지도 빨간색이었다.(위 로마 군 장교도 빨간 벼슬을 착용하고 있다.)
단 위장이 중요해진 현대전에서는 빨간색이 지나치게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는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군복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 근위대의 예복에서나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3. 얼굴은 가리는 것이 좋다.
얼굴 전면을 가리면 평범한 병졸도 꽤나 무서워 보인다. 일본에서는 아예 "면구(面具)"라 하여 얼굴 전면과 목을 가리는 마스크가 당당히 갑옷의 일부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평범하게 얼굴만 가려도 좋지만 위엄있는 수염을 달거나 송곳니가 튀어나온 괴물의 모습을 새기면 더 좋다.
근대 이후에는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드물어졌는데, 철모로 눈 언저리를 그늘지게 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독일군의 철모나 현재의 경찰 제복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4. 어깨선을 강조한다.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강조할 때 "떡 벌어진 어깨" 라는 말이 있듯이, 갑옷 또한 어깨를 세워우는 것이 좋다. 이 점에서는 아예 어깨에 두르는 방어구가 있는 일본 갑옷이 아주 발달했다.
한국 갑옷이 볼품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어깨선 때문에 그렇게 보일 확률이 높다. 한국은 문치 국가였고, 이런 곳에서는 지배 계급의 복장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듯한 모습을 하여 원초적인 공격성을 완화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어깨선 좀 넣으면 한국 갑옷도 못 봐줄 물건은 아니다.
갑옷의 중요성이 급감한 근대 이후 견장으로 대체되었다. 견장도 지금은 사관 생도들의 복장에서나 볼 수 있다.
+ 1: 약간의 장식들
이 외에도 남성미를 과장하기 위한 이런저런 장식들이 덧붙는데, 가슴 갑옷에 아예 "王자 갑빠"를 새겨버린 고대 그리스의 갑옷들이나 금수의 왕 호랑이 가죽을 사용한 갑옷, 송곳니가 튀어나온 귀신을 새긴 갑옷 등이 있다.
- 갑옷이 아니면서도 사실 위 조건들에 모두 들어맞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건담의 자쿠 디자인이다.
잘 보고 갑니다. 멋진 갑옷의 조건에 대해 잘 정리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갑옷이 멋있어 보이지 않는 이유가 어깨선이 강조되어 있지 않아서라 하셨는데,
나름대로 조선시대 갑옷도 어깨선을 위해 어깨견장이 달려 있었습니다. 견철(肩鐵)이라고 하죠.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장수들이 착용한 갑옷에 용(龍)모양의 견철이 달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에 나오는 조선 갑옷(어린갑, 두정갑 등)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는 아직 없던 갑옷이라 사극 드라마의 고증 부족이 자꾸 눈에 걸리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조선시대 갑옷이 어깨선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만은 동의할 수 없네요…^^;;
저는 조선시대 갑옷이 나름 멋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굳이 멋이 없는 이유를 따지자면, 이건 제 생각인데요,
갑옷의 전체 모양이 원피스 형태인데다가,
사극에서 제일 많이 보이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갑옷인 두정갑의 경우
방호력과 화려함을 표상하는 철편(鐵片)이나 철찰(鐵札) 등이 갑옷의 겉면에 붙어 있지 않고, 갑옷 속면에 리벳으로 박혀있어서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밋밋해 보여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조선의 두정갑이 고구려 개마기병의 갑옷처럼 수많은 철찰들이 갑옷 겉면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면 밋밋해보이지 않고 멋있었을 겁니다. 조선 갑옷 중에 그나마 철찰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게 사극에서 이순신 장군이 입고 나오는 어린갑인데, 이건 화려했다고는 하나 방호력이 별로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의장용으로만 쓰였다네요.
그리고 하나 더, 우리가 잘알고 방송에서 자주 접하는 조선시대 갑옷은 조선후기의 갑옷이고요, 조선시대 전기의 갑옷은 사극에 나오는 두정갑과 어린갑이 아니라, 철편이 겉면에 촘촘히 박힌 원피스 형태의 것(일명 “철찰갑”)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투구도 길쭉한 간주형 투구가 아니라, 중세 서유럽의 캐틀 햇 같은 챙 달린 투구였다고 하고, 일반사병들도 전립과 면포가 아닌 이런 철투구에 철찰갑을 착용하고 방패(둥근 방패- 일명 “팽배”)를 썼다고 하네요. 조선 전기의 철찰갑이 조선후기의 두정갑과 어린갑, 면갑(면을 겹겹이 붙인 일반사병의 갑옷)으로 바뀐 건 임진왜란이 끝나고 화포가 일반화된 이후의 일이라고 하네요. 그러니까 전립에 면포를 입은 사병의 모습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거죠. 철투구에 철찰갑을 착용하고 방패를 든 조선의 병사들이 일본의 아시가루들과 싸운 거죠.
사극에서 전립에 면포만 걸친 조선 포졸들이 삼지창을 들고 철갑옷으로 무장한 일본 사무라이들과 싸우는 장면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사극의 고증이 정말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냥 짧은 지식으로 주저리주저리 적어봤습니다. 조선도 나름대로 무기나 갑옷이 발달했지만, 전쟁에 대한 방비 소홀과 방송사극의 고증 부족으로 나약한 문치국가라는 이미지를 짊어지고 있는거 같아서 안타까워 길게 적어봤습니다. 잘난 척 한다고 욕하지는 말아주세요…^^;;;
위의 갑옷에 대한 내용은 <조선의 무기와 갑옷(민승기 저 - 가람기획)>이라는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주인장도 이 책 아실 거 같은데.. 다른 글들 보니까 그런 거 같네요….
블로그의 자료들 잘 보고 있습니다^^ 자주 방문할께요
예, 하지만 한국 갑옷은 여전히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갑옷에 비해서 어깨 부분이 좀 모자라더군요.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이 두정갑을 입은 사진을 본 적이 없으니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요. 토키미츠님이 말씀하신 외부 임팩트가 모자람(밋밋함)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겠습니다.
민승기 씨의 책은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중서적인 만큼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전문가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름의 한계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인용하실 때는 이 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 책으로 기본적인 것을 공부한 뒤 실제 유물과 논문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