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얼개가 잡혔다면, 그에 맞는 문화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내면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특정 문화의 역사는 줄거리, 사건, 인물 등에 영감을 주는 영원한 원천이 될 수 있다.

  • 판타지 레퍼런스: 작가를 위한 가이드 북 by 테리 브룩스

1.

워크래프트의 세계가 판타지 물에서 뚜렷하게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워크래프트 어드벤처>부터일 것이다. 사실, 그 전에는 세계관이 그리 개성이 없었다. 인간과 오크가 전쟁을 벌인다는 세계관은 톨킨 본좌의 영향을 받은(그리고 북구 신화의 영향을 받은) 서양식 판타지에서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워크래프트가 C&C와 함께 RTS의 창세기를 장식하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오크는 흉폭한 괴물이었을 뿐

비록 <어드벤처>는 개발 중단으로 몇 장의 스크린샷과 트레일러 동영상을 남긴 채 세상 저편으로 사라져 갔지만, 어드벤처의 이야기는 크리스티 골든의 소설 <워크래프트: 종족의 지배자>로, 워크래프트 3의 캠페인으로 이어지면서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갔고 온라인 게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늑대와 춤을>, <가을의 전설>, <라스트 사무라이>, <히달고>... 공통점은? 바로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등장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하나 더, 인디언들을 아주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 교감하는 존재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명예로운 사냥꾼과 전사들.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지 못한 영적인 존재들. 과거 야만인 악당에 불과했던 인디언들의 이미지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러한 영화들이 만들어져서 흥행할 수 있었다.

블리자드는 오크들에게 북미 인디언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오크 샤먼들에게 인디언 샤먼의 무복을 입혔고 평원의 사냥꾼 타우렌 마을에는 토템 폴을 꽂았다. 오크들이 어쩌다 망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한때 고도의 샤머니즘 문화를 이루었던 오크들은 악마와의 계약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고, 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워크래프트의 세계는 개성을 얻었고, 또 게이머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인디언을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을 납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버섯구름 봉우리의 타우렌 정착지

따지고 보면 블리자드의 "종족 만들기 신공" 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숲의 종족 나이트 엘프는 켈트 신화에서,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는 고대 로마와 중세 십자군 조직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프로토스의 통치자는 집정관이라고 불리며, "템플러Templer"는 예루살렘의 성묘를 수비하는 성전기사단Templers에서 온 말이다.) 둘 다 서양인들에게 있어서는 특유의 신비로움으로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 것들이다. 블리자드가 만들어낸 세계관들이 하나같이 또다른 현실과 같은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애시당초 억지로 꾸며 낸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3.

<불타는 성전> 한정판에 들어 있는 화보집을 보다 그림 한 장에 눈길이 갔다. 정장을 갖춘 타우렌 전사. 가슴에 매단 장식이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생각이 났다. 언젠가 본 북미 인디언 추장의 가슴에 매달려 있던 장식물이었던 것이다.

wow 게임 로딩 화면에 사용된 일러스트.

수우족의 추장, 레드 클라우드(1822-1909). 가슴에 뼈를 엮어 만든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북미 인디언의 장식물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소품들과 어울려 전체적인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이건 중세 기사의 갑옷을 모르는 사람도 여닫이 투구를 보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는 기사를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억지로 꾸며 낸 듯한 조잡스러움 없이 자연스러움이 느껴져서 좋다.

소머리를 한 타우렌이 실제 세계에 존재할 리가 없다. 하지만 있는 없든과 납득하든 말든은 전혀 다른 문제인 법, 그림을 응시하는 짧은 순간동안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지모신이시여, 오늘 자비를 베푸시어 풍요로운 사냥감을 얻게 하소서." 사냥을 나서면서 나직이 기도하는 타우렌 사냥꾼이 세상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았다.

게임의 이름에 관하여 by 빌 로퍼(스타크래프트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