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젠가 아는 블로거 한 분이 블로그에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태국의 왕에 대한 일화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1 내용은 국민들을 사랑하는 태국의 왕에 얽힌 일화들이었는데, 이 글이 신문에도 인용되는 덕분에 안 그래도 방문객 수가 많던 그 블로그에는 평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리플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그 글을 아주 흥미있게 봤다. 내용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리플들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리플들이 "이런 분이 한국에 계셨다면 종신토록 왕으로 모셔도 될 것 같은데요" "짜잘한 국회의원들 다 필요없이 이런 분 한 분이 권력을 잡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리플들을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전세계적으로 보면 엄연히 상위권이다. 리플을 단 사람들은 태국 푸미폰 국왕같은 사람이 있으면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태국 별명은 전세계 창녀촌이다.

2.

갑자기 옛날 일을 끄집어내는 건, 요즘 핫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과 이 리플들이 묘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전근대적인 사회는 왕이 다스리는 사회다. 이른바 유교적 왕정이다. 이런 나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건, 다스림을 행하고 가르침을 주는 어르신의 존재다. 가정에 가부장이 있듯, 국가에도 왕이 있어 이러한 역할을 행한다. 무엇보다도 어르신의 행동은, 아랫사람들의 모범이 되도록 점잖아야 한다.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한다던가, 촐싹맞게 아랫사람들과 왈가왈부 떠들어서는 안된다.

반면 근대 이후의 사회는 시민 스스로가 다스린다. 이른바 민주국가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린다. 모두가 스스로의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발표하거나 남의 의견을 반박할 수 있다.

언젠가 영국 신문에 실린 기고문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어떤 문제에 있어서 찰스 황태자가 낸 의견을 시민 한 명이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민주 사회에서는 이렇게 황태자도 당당히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다른 시민이 이를 반박할 수 있다. 황태자건 장삼이사(張三李四)건, 엄연히 같은 시민이기 때문이다.

3.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143&article_id=0000062860§ion_id=100&menu_id=100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 대해 야당은 물론이고 각지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으니 블로고스피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역시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비난하는 이들의 태도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왜 대통령이 촐싹대고 그래?"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있다니..." 운운이다. 심지어 악플을 못 이긴 고등학생이 자살한 사건도 노무현 탓이라는 포스트가 올블로그 1면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개그도 수준급이다.

노무현의 주장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그러면 근거를 들어 반박을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있어도 연설 내용에 대한 반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왜일까? 대통령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 나라의 「어르신」인 대통령이 점잖치 못하게 「아랫사람」들에 대해 왈가왈부했다는 것이 싫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의 입에서 "왜 대통령이 촐싹대느냐" 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이런 식으로 볼 때, 상당수 한국인들의 사고 방식은 근대 시민(市民)보다 전근대 신민(臣民)에 더 가깝다. 그들의 머릿속에 대통령이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어르신2이다. 어른이 어른 노릇을 못한다고 생각하니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류의 신민들은 받을어 모실 어르신이 없으면 불안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나라 국왕을 수입하지 못해 안달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나왔던 "노무현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 는 말들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이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다. 헌법이 정한 절차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을 부정하는 것이니 중대한 체제 부정이 아니고 뭐냔 말이다. 하기야 이 전근대적인 신민들의 눈에 근대적인 헌법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신민들의 눈에 후보 시절부터 토론 좋아하는 걸로 유명했던 노무현은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고, 마땅히 어르신의 자리 =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신민들이여, 그렇게 어르신을 떠받아 모시고 싶으면 조용히 북녘으로 가시라. 거기엔 "인민을 따뜻이 감싸시고 보살피시는 어버이 수령님" 이 계시다. 남은 평생을 그토록 원하는 어르신 모시면서 아오지 탄광 삽질하는 데 바치시라. 안 말린다.

사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이러한 멘탈리티가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노조를 탄압하고 편법 상속을 시도하던 삼성 이건희 회장은 거의 비난을 받지 않는다. 반면에 최근 이슈가 된 한화 김승연 회장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불법의 크기로 보면 수천억짜리 사고를 친 이건희 회장이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간의 차이는, "점잖치 못하게 쇠파이프 들고 사람을 협박했느냐 안했느냐" 뿐이다.

5월 30일 한겨레 그림판

한국인들은 김승연 회장의 조폭을 앞세운 불법행위를 비난했다기보다, 그의 점잖치 못한 행동을 비난한 것이다.(스스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사회적으로 어르신인 대기업 회장님이 왜 체신머리없이 그 따위 짓을 하느냐" 그들의 속마음은 아무래도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렇게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의 머리 속은 아직도 상감마마가 설렁탕 말아먹던 17세기를 달린다. 아이고 배야. 웃다 지쳐 돌아가시겠다.3

4.

좀 다른 얘기를 하는 부류들도 있긴 하다. 이 친구들은 노무현이 자기 주장을 절대 진리처럼 남에게 강요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다고 한다. 그런 인간들은 왜 자기네 주장을 절대 진리처럼 내게 강요하는지에나 답할 일이다. 노무현이 언제 "이건 진리이니 꼭 받아 적어서 외우세요." 라고 했다던가? 전혀 없다. 이 친구들의 주장이나 노무현의 연설이나, 모두 헌법에 보장된 정치적 의견일 뿐이다. 노무현도 대통령이기 전에 한 명의 시민이고, 자기 주장을 밝힐 권리를 지닌다. 마음에 안 들면, 반박을 해라. 헌법에 보장된 권리에 태클걸지 말고.

이번 연설에 대해 노무현 지지자인 나도 아쉬운 점은 많다. 무엇보다 현직 대통령이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써도 되는지 묻고 싶다.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난 그와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내가 애써 그 얘기를 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하는 건, 노무현을 비난하는 자들의 그 닳아빠진 멘탈리티가 더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설문에 그렇게 틀린 말은 없더라. ㅋㅋㅋㅋ


  1. 이 분의 블로그는 현재 이사 + 개편중인지라, 여기 링크된 글은 그 분의 블로그에 실린 글이 아닌 남이 퍼간 글이다. 이 글을 쓴 파파울프님의 새 블로그는 바로 여기다. 

  2. 나는 대통령이 왜 나라의 어르신인지 모르겠다. 어르신을 선거로 뽑나? 대통령은 최고위 선출직 공무원일 뿐이다. 

  3. 결과적으로 노무현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 수준을 폭로하고 말았으니, 훗날 역사책에 정치가가 아닌 행위 예술가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