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기병 전술

북방의 유목민들은 전통적으로 기마궁수 전술을 애용해 왔습니다.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기사(騎射)라고 하는데, 이 기사라는 것은 유목민의 장기입니다. 기사는 말타는 능력과 활을 쏘는 능력이 모두 필요한데, 목축 생활을 하면서 간간이 사냥까지 해줘야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이 능력은 정주민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북방 변경 지역을 기습하여 약탈하는 유목민들은 언제나 중화 통일 왕조의 골칫거리였습니다. 발이 느린 보병은 결코 발빠른 기마궁수를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중원의 군대는 장거리 병기를 강화시켜 경무장한 기마궁수들을 사살하는 방법을 발달시켰습니다. 사정 거리가 길고 강력한 쇠뇌(노)나 연노와 같은 무기로 무장한 부대를 편성함으로써 북방의 강력한 기병들을 격퇴하는 방법이 이미 전국 시대 초기(BC 5세기)에 개발되었습니다. 삼국 시대, 제갈공명이 이끄는 촉한군은 위나라의 강력한 기병(위나라는 흉노, 강족과 같은 이민족들에게서 기병을 보급받을 수 있었습니다.)에 맞서기 위해 연노로 무장한 부대를 편성하기도 합니다.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무기, 연노. 에서는 제갈공명이 발명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전국시대 이후 일반화된 병기였다. 제갈공명은 여러 명이 다루던 연노를 개인이 다룰 수 있도록 소형화시켜 실전에 투입했다(이것을 원융元戎이라고 한다.). 위 그림은 에 실린 연노 그림이다.

투사 병기의 발달은 기병 방어구의 발달을 낳았습니다.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 중장기병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만 해도 특수 부대일 뿐, 잘 사용되는 병종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200년 원소와 조조가 맞붙은 관도대전에서 원소군 기병은 1만 명이나 되었지만, 그 중 중장기병은 300여기에 불과했을 뿐이고 조조군은 10기도 안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호 십육국 시대가 열리고 유목민들이 중원 땅에 자리잡게 되자, 중장기병의 규모는 급팽창하기 시작합니다.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은 약탈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여차하면 흩어져서 도망쳐버리고 말지 굳이 기동성을 희생해 가면서 말에 무거운 갑옷을 씌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원에 자리잡은 유목민들이 영토 다툼을 하게 되면서, 기마궁수들은 노의 공격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말과 사람에 갑옷을 씌워 보병 대열을 부수는 방법이 유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중장기병은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급부상합니다. 역사서 은 당시 전쟁에 대하 기록하면서, 갑옷 입은 말을 얼마나 노획했느냐가 전투의 성과를 묘사하는 중요한 척도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냥 더도말고 덜도말고 탱크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중장기병에 대해 가장 오래된 자료는 357년경 만들어진 황해도의 고구려 고분(안악 3호분)이며, 대략 390년경에 그린 듯한 운남성(중국 남서쪽 끝) 고분 그림에 중장기병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중국 전역에 보급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로 중장기병을 묘사한 유물들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전파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중국 근방에서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전술을 고안해 낸 것은 중국 동북지방의 유목민(특히 선비족)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고구려의 중장기병

고구려에서 중장기병이 언제 등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240년, 요동지역을 다스리던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을 패배시킨 동천왕이 철기 오천을 이끌고 추격하다 위나라 군대의 역습을 당하여 대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철기"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예 기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갑옷을 입은 기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까지 갑옷을 입힌 중장기병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쌍영총 고분 벽화에 묘사된 고구려 중장기병.

좀 더 확실하게 중장기병의 등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벽화입니다. 여기에 중장기병이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357년에는 고구려에 중장기병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주변의 종족들 중 가장 먼저 중장기병을 보유한 것이 확인되는 종족은 선비족의 일파인 단선비입니다.(312년 중원을 장악하고 있던 유목민인 갈족과의 전쟁에 5천 명의 중장기병을 투입한 것이 확인됩니다.) 3세기 말 이래 단선비·우문 선비는 요서 지역을 배경으로 모용 선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또 319년 이후 모용 선비(전연前燕)의 세력이 급팽창하는 것으로 보아 모용 선비는 단족을 통해 중장기병을 도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전연과의 전쟁에서 중장기병을 흉내내어 도입했을 수도 있고, 330년 이후 중국 북동부을 장악한 후조(後趙)를 통해 중장기병을 도입했을 수도 있습니다.(후조는 전연과 사이가 나빠 338년에는 고구려에 군량 30만곡을 보내 전연 협공을 준비하기까지 합니다.)

중장기병의 무장과 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