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마니아들이 여행을 가면 박물관이나 유적지의 사진을 찍어 오기 마련입니다. 유물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나중에 자기가 글 쓸 때 쓰기 위해 자료로 보관하기도 하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사진기 들고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이것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쌓이더군요.

아래 내용은 제가 그 과정에서 느낀 것들입니다. 무기나 갑옷에 흥미를 느끼는 초심자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었으면 합니다.

1. 공부하고 가라.

두말할 필요가 없다. 100을 공부하고 가면 100밖에 안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상태에서 사진을 찍어 봐야 105에서 110 정도밖에 담지 못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일단 자료사진을 찍어 놓고 나중에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중에 사진을 보면서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찍었어야 했는데" 하면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삼국 시대의 판갑의 경우, 철판의 접합선이 중요한 분류 기준이 된다. 즉, 이걸 찍으려면 철판의 접합선들이 최대한 나오게 찍는 게 좋다. 모르는 사람은 사진도 못 찍는다. 미리 박물관을 한 번 둘러 본 다음에 찍는 것도 요령이다.

2.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라.

유럽의 박물관의 경우, 웬만하면 개인적 용도로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한다. 하지만 일본의 박물관은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박물관들은 잘 통제하지 않으니 사진을 찍어도 별 문제 없지만, 한국 최대의 도검 박물관인 경인미술관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는,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는지 반드시 물어 보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대개 기념품 판매소에서 판매하는 관련 도록은 사오는 게 좋으며,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때는 그 필요성이 더욱 짙어진다. 아예 도록 살 돈을 따로 준비하자.

이것이 밥 두 끼를 포기해 가며 건져올린 전리품. 2004년, 도쿄의 일본 도검 박물관을 갔을 때 구입한 것이다. 고어핀드는 그날 오후 내내 자린고비처럼 이 도록만 쳐다봤다고 전해진다.

3. 플래시는 꺼라.

최소한의 매너다. 카메라 플래시 때문에 유물이 상할 수 있다. 실제로 사진 촬영을 허가하는 곳의 경우,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다" 는 것이 전제 조건으로 붙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의 하나 사진을 못 찍는 곳에서 플래시를 터트렸다가는 당장 쫓겨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똑딱이 카메라로서는 제약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빛도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게 된다면 좋은 퀄리티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필자도 작년 초 마카오에 갔을 때 그것을 많이 느꼈는데, 결국 지난 여름 Nikkon D-80 DSLR + Sigma 30mm 단렌즈를 장만했다.

플래시와 함께 챙겨야 할 것은 개념이다. 영국의 경우, 대영박물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도 빅토리 호의 선수 구획만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넬슨 제독이 숨을 거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 오사카 성을 가면 아는 것도 없는 한국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옆사람하고 이야기도 안 되는데,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4. 한 번에 한 개만 찍어라.

진열대를 통채로 찍는 중생들이 있다. 일반 관광객이라면 몰라도, 마니아로서는 어리석은 짓이다. 기본적으로, 사진은 자랑하기 위해 찍는 게 아니라 기억을 보조하기 위해 찍는 것이다. 기억하기 힘든 디테일을 보존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건데, 디테일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사진 한 장에 여러 개를 한꺼번에 찍는다면, 각각의 유물은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가능하면 한 번에 한두 개만 찍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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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의 고대 그리스 투구. 아무렇게나 찍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선명하게 잘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스 전사들이 묘사된 도자기들을 찍어오지 않은 게 아쉽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필자의 경우, 환두대도 하나를 찍어도 a. 전체 모습 찍고 b. 손잡이 부분 확대해서 찍고 c. 칼 차는 부분 확대해서 또 찍는다.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손기정 옹의 코린토스식 투구 한 개만 7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모두가 강조점이 다른데, 잘 나와서 크게 만족한다.

5. 여러 장 찍어라.

한장 찍고 넘어가면 안 된다. 사진을 찍는 환경이 제한적이므로, 모니터에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카메라의 액정 화면 정도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방법은 하나, 같은 피사체를 여러 번 찍는 것이다. 나중에 잘된 것만 골라낸다.

6. 미리 준비해라.

크게 두 가지 의미다. 언제 어디에 갈 지 모르므로, 카메라를 항상 잘 손질해서 보관해 놓는다. 편광 필터를 장착해 놓거나 배터리 두 개를 완전히 충전해 놓는 건 기본이다. 플래시를 터트릴 수 없으니, 적당한 촬영 환경을 설정해 놓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베를린 박물관은 고대 그리스 투구가 많기로 유명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갑옷 전시관은 세계 최고라 할 만 하고, 일본이나 영국의 성에는 웬만하면 무기 전시실이 있다. 국내 여행서적은 쇼핑하는 곳은 챙겨도 이런 곳은 챙기지 않는다. 필자는 항상 자료를 조사하면서 google maps에 그 결과를 보존한다. 혹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찾아가자.

우리같은 사람에게 평범한 여행안내서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일반인들은 그걸 모르죠.

7. 유물 설명을 반드시 보존해라.

가장 중요한 것이다. 기억을 보조하기 위해 찍는 것인 만큼, 유물 설명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필자 같은 경우는 a. 일단 유물 사진 다 찍고 b. 유물 설명만 접사로 한번 더 찍는다. 이렇게 하면 각 유물의 의미를 충분히 기억할 수 있다. 메모지도 준비한다. 유물을 보면서 특이한 것, 궁금한 것을 적는다.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8. 정리하고, 공개하고, 공유해라.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 정리를 해야 한다. 필자는 Flickr를 쓰고 있는데, 각종 설명이나 tag를 달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 틈틈이 정리한다. Creative Commons Lisence로 공개하면 다른 이들이 저작권 걱정 없이 쓸 수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 실제로 필자 역시 같은 라이센스로 공개하고 있다.

Flickr에 들어가 보면 전세계의 전쟁사 마니아들이 찍어 놓은 수많은 무기, 갑옷, 그림, 리인액트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그 상당수가 무료로 공개된다. 맨날 한국어 인터넷에 자료가 없다고 찌질대지 말고 좀 본받자. 해외 마니아들은 우리보다 수준도 높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자료 공유도 많이 한다.